존 플라벨, 죄로 물든 두려움 이기기
존 플라벨, 죄로 물든 두려움 이기기
우리는 이제 이 사역의 가장 어려운 부분, 즉 위험의 때에 피조물을 향한 죄성 어린 종욕적(노예적)인 두려움을 치료하는 일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복 주심을 통해 이것이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원수들과 환난의 한가운데서도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요, 하늘의 해와 같이 가장 어둡고 캄캄한 날에도 우리의 확고한 행로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구체적인 지침들로 나아가기 전에,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 문제에 관한 세 가지 유익한 경계(주의사항)들을 제시하는 것이 필연적일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안전은 그리스도께서 몸을 죽이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소멸시키기 위해 사용하신 가장 거대한 논거입니다(마 10:28). 그러나 만약 몸이 멸할 때에 영혼이 불가불 함께 파멸해야 한다면, 만약 몸이 무덤에 누이기도 전에 영혼이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면, 만약 몸을 죽이는 자가 바로 그 동일한 타격으로 영혼을 자비와 행복의 모든 수단과 가능성들로부터 영원히 끊어버리는 것이라면,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두려움과 떨림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어찌 다른 무엇을 제공할 수 있겠습니까?
원수들과 위험들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가장 선한 심령들 안에서도 얼마간의 두려움들이 역사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질 수 있다면 우리의 두려움들도 온전히 치료될 것이나, 우리의 믿음 안에 그토록 많은 연약함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두려움들 안에 너무나 많은 힘이 실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선천적으로 겁이 많아 다른 이들보다 체질상 이러한 격정을 더 많이 가진 자들과, 우울증(멜랑콜리)이 뿌리 깊은 만성 질환으로 자리 잡은 자들에게 있어서는, 비록 다음에 이어지는 그러한 도우심과 수단들을 사용하는 중에 그것들의 압제로부터 거대한 구제를 받고 훨씬 더 많은 평온함과 위로 속에서 자신들의 영혼을 소유할 수 있게 될지라도, 자신들을 두려움과 낙담으로부터 온전히 건져내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온전하고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한다면, 우리가 의사에게 우리의 처지를 개방하는 것이나 그의 처방과 서면으로 된 지침들이 그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무리 그것을 싫어할지라도 저 쓰고 메스꺼운 물약을 복용하기로 결단해야 하며, 그가 아무리 그것을 좋아할지라도 해로운 음식을 절제해야만 합니다. 이 경우 역시 그러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전제한 후, 다음의 지침들을 제시합니다.
나는 언약의 성격과 범위와 견고함, 그리고 그 안에서의 우리의 분깃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 어린 종욕적인 두려움들을 치료하는 데 있어 거대한 진전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언약은 단순한 날 약속(naked promise) 그 이상입니다.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두려움과 의심들을 자애롭게 고려하셨으며, 그러므로 엄숙함의 가장 높은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행하시어, 자신의 약속들을 맹세로 확증하시고(히 6:13, 17) 자신의 인(seals)으로 확증하셨습니다(롬 4:11; 원문 Rom. 6:11은 오기로 보임). 자신의 백성에게 하실 수 있는 가장 엄숙한 결속과 서약 아래 자신을 두심은, 우리와 맺으신 언약의 이토록 견고한 비준으로부터 우리로 하여금 강한 안위를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히 6:18). 그분은 그것이 안과 밖 모두로부터 임하는 환난의 모든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의 약하고 겁 많은 심령에 강한 지탱과 가장 소생하게 하는 강장제를 제공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이 정돈하셨습니다.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자신의 백성에게 넘겨주어,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리라 하십니다(렘 31:33, 히 8:10).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영광스러운 본질적 속성들을 우리에게 부여하시니, 이는 그분의 전능하신 권세와 무한한 지혜와 측량할 수 없는 자비가 우리의 보호, 지탱, 건지심, 인도, 사죄, 혹은 신선하게 하심을 위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삶의 모든 궁지와 두려움과 위급함 속에서 우리에게 신실하게 이행될 것임을 우리로 하여금 확신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모든 두려움들을 대적할 가장 주권적인 해독제로서 이것을 믿음으로 활용하기를 기대하십니다(사 43:1, 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등등. 이사야 41장 10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그리고 독자여, 만약 당신이 언약의 줄 안에 있다면, 당신의 두려움들의 문제나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분명히 그곳에서 당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은 당신의 모든 궁지와 궁핍과 환난 속에서 당신과 함께하실 것이요,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모든 환난을 대적하여 스스로 격려를 얻었던 것 역시 다름 아닌 이 언약으로부터였습니다(삼하 23:5).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자라게 하지 아니하시랴)." 그는 그곳으로부터 모든 구제와 모든 위로와 구원을 길어 올릴 수 있었으니, 왜 우리는 할 수 없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마음을 지탱하기 위해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으니, "이것이 나의 모든 소원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만약 우리가 그것을 그가 이해하고 믿었던 것처럼 이해하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 언약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보다 우리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위로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환난들 속에서," 그가 말하기를, "나는 더 약하고 당신은 더 강하구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생명은 경멸하면서도 공적인 대의는 두려워하고 있소. 그러나 공적인 대의에 관해서라면 나는 안식하고 있으니, 그 대의가 의롭고 참되다는 것을, 참으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대의이자 하나님의 대의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오. 나는 일들의 한가운데서 거의 안전한 목격자이며, 이 맹렬하고 위협적인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자행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유념하지 않소.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에게 간청하노니, 성경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여호와를 바라고 강하고 담대하라 그가 네 마음을 위로하시리로다' 라고 말씀하시는 저 신성한 약속들과 안위들을 소홀히 취급하지 마시오."
그리고 또 다른 서신에서 이와 같이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적어 보냈듯이 당신을 거의 소멸시키고 있는 저 불안한 염려들을 심히 싫어하오. 그것은 위험의 거대함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불신앙의 거대함 때문이오. 얀 후스(John Huss)와 다른 이들은 우리보다 더 거대한 위험 아래 있었소. 그리고 만약 위험이 거대하다면, 그것을 다스리시는 그분 역시 거대하시구려. 당신은 어찌하여 스스로를 괴롭게 하시오? 만약 대의가 악하다면 그것을 포기합시다. 만약 그것이 선하다면,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 명하시는 그분을 어찌하여 거짓말쟁이로 만드시오? 마치 당신이 그와 같은 유익 없는 염려들에 의해 그 어떤 선이라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오. 내가 당신에게 간청하노니, 다른 일들 속에서는 용맹한 당신이여, 사탄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는 당신 자신의 가장 거대한 원수, 곧 당신 자신과 대항하여 싸우시오."
여러분은 선한 사람들이 공적인 두려움들에 의해 어떻게 온전히 압도당할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저 언약의 결속을 잘 고려한다면, 우리는 더 고요하고 가라앉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1) 하나님께서 그들의 한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시 46:1-4). 루터의 시대에 개혁 교회의 연약한 태동기에 그 어떤 거대한 위험이 위협할 때마다, 그는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시편 46편을 찬송하자" 하였으니, 진실로 그것은 그러한 시대들을 위한 사랑스러운 노래입니다. 그것은 '알라못에 맞춘 노래', 곧 '숨겨진 자들을 위한 노래'라는 표제를 가졌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날개 아래 덮어주시기 위해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2) 그리고 교회가 살아온 것만큼 오랜 세월 동안 하늘 아래 그 어떤 백성도 이토록 놀랍게 보존되어 온 백성이 없다는 사실은 온 세상에 명백히 드러난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교회는 수많은 피비린내 나는 학살과 두려운 박해와 교활하고 잔인한 원수들을 이겨내고 살아남았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존하시고 건져내셨으니, 그분의 약속들이 그분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의무 지었기 때문이며, 그것들 중에 저 두 가지는 신호이자 저명한 것들입니다(렘 30:11, 사 27:3). 그리고 일들을 고려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명백한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시작부터 그분 안에 존재했거나 그분 앞에 놓여 있었던 것과 온전히 동일한 동기들과, 온전히 동일한 근거들과 이유들이 그분의 교회와 백성을 돌보시기 위해 여전히 그분 안에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1) 그 관계가 여전히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저 저명한 신자들이 자신들의 무덤 속에 누워 있고, 그들을 계승하는 자들이 은혜와 영적 탁월함에 있어 그들보다 훨씬 비천할지라도, 교회는 말하기를 "주는 우리 아버지가 되시나이다" 합니다. 가족 안에서 아버지와 가장 어리고 연약한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결속과 끈은, 가장 연장자요 강한 자녀와 맺어진 것과 동일합니다. (2) 그분의 긍휼과 자비는 여전히 동일하니,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중심은 과거의 그 어떤 고난이나 궁지 속에서 그러하셨던 것만큼이나 부드럽게 그들의 현재 고난 위에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 타오르고 있습니다. (3) 그분과 그분의 백성의 원수들의 분노와 악의는 여전히 동일합니다. 만약 그분께서 지금 자신의 백성을 내어주신다면, 그들은 과거에 그러했던 것만큼이나 신성모독적이고 불명예스럽게 하나님 위에 반영될 것입니다. 모세의 논거인 "애굽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하겠나이까?"는 과거에 그러했던 것만큼이나 지금도 유효하며, 여호수아의 논거인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역시 그러합니다. 오! 만약 이러한 것들이 더 철저하게 연구되고 믿어진다면, 그것들은 수많은 두려움들을 잠재울 것입니다.
1. 죄성 어린 두려움이 이 세상에서 인간들에게 가져오는 비참함과 재앙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토록 많은 불쌍하고 가련한 자들의 양심을 그토록 깊은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원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지옥에 떨어진 정죄 받은 자들처럼 울부짖게 만든 원인입니다. 어떤 이들은 회복되었으나, 다른 이들은 이 공포와 절망의 심연 속에서 파멸해 갔습니다.
"1550년 이탈리아 페라라(Ferrara)에 파니누스(Faninus)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책들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의 지식에 회심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아주 커다란 달콤함을 발견한 나머지 끊임없는 독서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성경에 아주 능통한 자가 되어 타인들을 교훈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비록 그가 자신의 소명의 범위를 벗어나 공개적으로 설교하는 일은 감히 하지 못했으나, 대화와 사적인 권면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끼쳤습니다. 이 일이 교황의 하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자, 그들은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고, 그곳에서 그는 진리를 부인한 후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일로 인해 그를 만나시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양심의 끔찍한 고문 속에 빠져들어 전적인 절망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더 신실하게 걸기로 온전히 결단하기 전까지는 그러한 공포들로부터 결코 자유해질 수 없었습니다."
불쌍한 스피라(Spira)가 자신의 죄성 어린 두려움에 굴복하여 진리를 부인하자마자, 자신의 양심 속에서 듣는 듯했던 저 목소리는 실로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이 악하고 가련한 자야, 네가 나를 부인하였고, 네 순종의 언약을 외면하였으며, 네 서약을 깨뜨렸도다. 그러므로 배교자여, 너의 영원한 정죄의 선고를 네 지체에 짊어질지어다."
즉시 그는 기절하여 번민하고 떨었으며, 죽을 때까지 다음과 같이 확언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내 마음에 그 어떤 안식이나 평안도 결코 찾지 못했노라."
도리어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복하시는 손길 아래 사로잡혔으며, 공의로우신 재판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적하여 내리시는 선고를 끊임없이 듣고 있노라. 그리고 내가 전적으로 파멸하였음을 아노니, 은혜를 소망할 수도 없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아버지께 중보해 주실 것을 기대할 수도 없도다."
우리의 저 두려웠던 메리 여왕의 치세(Marian days) 때, 에드워드 6세 왕의 스승이었던 존 치크 경(Sir John Cheek)은 런던 탑에 갇혀 독방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그보다 더 보배로운 양심의 자유를 포기하든지 해야 하는 비참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그의 대단한 친구들조차도 그의 종교를 철회하는 것보다 더 낮은 대가로는 그의 자유를 조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받아들이기를 매우 꺼려했으나, 가혹한 투옥 생활과 더불어 만약 거부할 경우 훨씬 더 나쁜 일이 닥칠 것이라는 위협이 임하자, 마침내 그가 혈육과 의논하는 동안 그것이 그에게 역사하여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고백해 왔고 여전히 믿고 있던 저 진리를 배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자유는 회복하였으나, 자신의 위로는 결코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배교에 대한 자각과, 진리에 견고하게 고수한다는 이유로 타인들에게 자행되는 잔인한 도살 행위들을 매일 눈으로 목격한 것이 그의 상한 심령에 너무나 깊은 각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신속하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으나, 마지막에는 얼마간의 안위 넘치는 소망이 없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의 역사들에도 이와 같이 애통한 예들이 수없이 풍성합니다. 어떤 이들은 양심의 그토록 커다란 공포 속에 사로잡힌 나머지 생명보다 오히려 목을 매는 것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 양심의 고통을 느낀 나머지, 그것으로부터 자신들을 건져내기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대적하는 절망적인 결단과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쌍한 피터 문(Peter Moon)의 처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들에 몰려 진리를 부인하게 되었고, 즉시 양심의 그러한 공포 속에 빠져들어 자신의 거실에 걸려 있는 칼을 보고는 그것을 자신의 배에 꽂으려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프란시스 스피라 역시 자신의 종말이 가까워졌을 때 식탁 위에 있는 칼을 보았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 자신에게 해악을 입히려 하였으나 그의 친구들이 그를 저지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가 말하기를, "오! 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면 좋겠도다. 그분이 내게 그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아니하실 것을 내가 아노라" 하였습니다. 역사가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약 8주 동안 끊임없는 화염 속에 누워 있었으며, 그 어떤 것도 원하지도 않았고 강제로가 아니면 받지도 않았으며, 그것마저도 소화시키지 못해 마침내 해골처럼 말라 버렸습니다. 마실 것을 격렬하게 갈구하면서도 오래 사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지옥을 두려워하면서도 죽음을 탐하였으며, 끊임없는 토막 고문 속에 있으면서도 스스로가 자신의 고문역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슬픔과 공포, 조급함과 절망으로 자신을 소모해 가며 지옥에 있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존재했던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권세의 비상한 본보기를 보여주었고 그렇게 자신의 비참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분명히 이와 같이 두려운 예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놀래켜 우리의 죄성 어린 두려움들로부터 건져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손으로부터 두려워할 수 있는 그 어떤 비참함이 이와 같겠습니까? 오, 독자여! 이것을 믿으십시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빠져드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가련한 자들이 느꼈던 것처럼 상하고 고통당하는 양심의 격정과 효력을 한 번이라도 느껴보았더라면, 인간들의 그 어떤 두려움이나 위협도 당신을 지구상에 있는 이와 같은 지옥 속으로 몰아넣지 못했을 것입니다.
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애통한 처지이기는 하나, 여러분 자신의 죄성 어린 두려움들이 여러분을 몰아넣을 가장 최악의 처지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분의 이름의 두려움(경외)으로 여러분 안에서 그것들을 이기시고 소멸시켜 주지 아니하신다면, 그것들은 여러분을 단지 지구상에 있는 일종의 지옥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지옥 그 자체 안으로 던져 넣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리의 말씀인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등등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위험의 때에 자신들의 두려움으로 인해 그리스도로부터 배반하는 겁쟁이들과 변절자들 위에 집행되는 저 하늘의 군법을 여기에서 보십시오. 이 두려워하고 겁 많은 고백자들이여,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더러운 던전 속에 눕는다는 생각조차 견디지 못하면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안에는 대체 어떻게 누워 있으려 합니까? 여러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얼굴과 찌푸림은 두려워하면서, 마귀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살아가려 합니까? 인간의 진노가 쏟아지는 하나님의 분노와 같겠습니까? 하나님의 새끼손가락이 이 세상의 모든 폭군들의 허리보다 더 무겁지 아니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십시오(마 10: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독자여, 이 말씀을 하신 그분께서 수많은 천사들과 자신의 수만 성도들을 동반하시고 큰 호령과 함께 하늘로부터 깨뜨리고 나오실 그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그분의 사면에서 두려운 대화재 속에 휩싸일 것이요, 마지막 나팔이 울릴 것이며, 무덤들이 열리고, 땅과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줄 것입니다. 당신의 눈은 그분께서 저 엄위하신 심판의 보좌에 오르시는 것을 볼 것이요, 모든 원수들과 위험들의 면전에서 그분을 시인하고 그분을 위해 나타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분의 신실한 자들이 판사석에 그분과 함께 배석자로 앉아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오래전에 풀과 같이 시들어 버린 동료 피조물의 찌푸림 때문에 그분의 이름과 진리들을 부인했던 당신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거대한 회중의 면전에서 영원히 거절하시고 배척하시며, 범죄자요 그분을 향한 반역자라 선포하실 것입니다. 오! 당신이 이것을 어찌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이제 당신의 진지한 고려 속에서 이 두 가지를 함께 묶어 보십시오. 여기에서 당하는 양심의 테러들과, 지옥에서 당하는 양심의 절망적인 공포를 생각하십시오. 이것은 살짝 데치는 것과 같고, 저것은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 속에서 통째로 굽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저 부드럽고 감각적인 부분인 당신의 양심 위에 미리 뿌려진 몇 방울의 끓는 물방울과 같고, 저것은 불과 유황으로 영원히 타오르는 못과 같습니다. 오! 단지 육체만을 만질 수 있을 뿐이요 그 지속 기간에 있어서도 오직 잠깐뿐인 그러한 고난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이 모든 비참함 속으로 몰아넣도록 방임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저 말씀들을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하십시오(막 8:35).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그것은 당신 자신의 계산으로 보더라도 죽음보다 더 나쁜 삶, 곧 비참한 삶의 연장에 불과할 수 있으며, 삶의 위로나 기쁨이 없는 삶이요, 둘째 사망으로 끝맺는 삶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당신이 나중에 당신 자신의 양심 속에서 느끼게 될 바에 비하면 한낱 사소한 것에 불과하고,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토록 당해야만 하는 고난에 비하면 사소한 것보다 더 적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경계하는 두려움(주의 깊은 두려움)은 심란하게 만드는 두려움을 치료하는 좋은 치료제입니다. 전자의 두려움이 많을수록 후자의 두려움은 적어집니다. 이 두려움이 저 두려움을 치료할 것이니, 마치 하나의 불이 또 다른 불을 끌어내는 것과 같습니다(히 11:7).
"노아는... 경외함으로(두려움에 움직여) 방주를 준비하여."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의 몸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준비했던 것만큼이나 자기 마음의 안식과 고요함을 위해서도 준비했습니다. 악을 그토록 두려운 것으로 만드는 원인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기습적인 방식으로 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안일할 때 우리를 찾아내는 환난들은 우리를 심란하고 절망적인 상태로 남겨두기 마련입니다. 지속적인 평온함에 대한 추정은 비참함을 가장 거대하게 가중시키는 원인 중 하나로 판명됩니다. 환난은 예상하고 있는 와중에 임할 때에도 충분히 무겁게 가해지겠으나, 예상을 완전히 비껴가며 임할 때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예상치 못한 대접들을 겪는 것이 바벨론의 몫이 될 것인데, 나는 그녀와 그녀의 자녀들 외에는 그 누구도 이와 같이 기습을 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계 18:7). 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즐거운 누림들의 한가운데서도 우리 자신에게 가장 어려운 처지들을 제시해 보며, 우리의 모든 땅 위의 누림들과 위로들 속에 이와 같은 몇 가지 생각들을 뒤섞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참으로 유익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내 거처의 한가운데서 평안히 있으나, 내 거처가 감옥이 될 때가 머지않았을지 모른도다. 나는 현재 미소와 영예로 가득 찬 친구들의 얼굴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으나, 머지않아 찌푸림과 공포로 가득 찬 원수들의 얼굴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될지 모른도다. 나는 지금 내 궁핍을 공급하고 내 가족을 부양할 재산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이 머지않아 원수의 노획물로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요, 그들이 내가 모은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고 내 모든 수고의 열매를 거두어 갈지 모르는 일이로다. (Impius has segetes—이 경작지를 경건치 않은 자가 차지하겠구나.) 나는 아직 내 생명을 노획물로 얻어 보존하고 있으나, 오! 그것이 얼마나 속히 잔인하고 피에 주린 손아귀에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로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모든 것들의 상실을 감내했던 저 순교자들이 가졌던 것보다 더 나은 보장을 이 일들에 대해 가지고 있지 아니하도다.'
이와 같은 묵상들로부터 우리에게 두 가지 유익이 초래될 것이니, 곧 다음과 같은 유익입니다.
1. 이로 인해 우리의 생각들은 이러한 악들과 더 잘 친숙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더 많이 친숙해질수록, 그것들을 마주할 때 놀라거나 공포에 질리는 일이 더 적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불 시험에 관하여 베드로전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마치 어린 망아지와 같아서, 마주치는 모든 새로운 것마다 놀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놀라게 만드는 장본인에게로 직접 데려가 그것의 냄새를 맡게 함으로써 그것을 치료합니다. 더 잘 친숙해지는 것이 이와 같이 깜짝 놀라는 기질을 치료합니다.
최근의 어느 엄숙하고 학식 있는 신학자가 말하기를, 악의 생소함이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음 자체가 그것과 사전에 마주쳐 본 적이 없어 그것의 힘을 판단할 수도 없고, 유사한 성공 속에서 자신의 소망을 확증해 줄 타인의 형통한 결말의 본보기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앞서 저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주목했듯이, 경험은 갑옷을 대신하는 것이요 일종의 용맹이어서, 환난을 판단하고 견딜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은 모르몰뤼케이아 카이 프로소페이아(μορμολύκεια καὶ προσώπεια), 즉 허수아비와 탈(가면)에 불과하여 어린아이들이 오직 무지함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알려지자마자 그것들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우리의 마음이 본성적으로 이와 같이 거칠고 불쾌한 주제들을 거부하고 기피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생각을 진지하게 그것들로 이끄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이 목적을 위해 필요한 만큼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게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미래의 행복과 형통에 대한 즐거운 전망을 취하고 싶어 하며, 욥이 말하듯이 우리의 날을 모래같이 번성시키다가 마침내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평안히 죽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각들은 기름 칠한 바퀴처럼 이와 같이 즐거운 공상들 위에서는 민첩하게 달려가므로 고임목을 댈 필요가 있으나, 고난의 깊고 진흙탕 같은 길 안으로 들어설 때에는 바퀴가 빠진 바로의 병거들처럼 무겁게 굴러갑니다.
그러나 가장 즐거운 것이 항상 가장 유익하고 필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슬픔과 잘 친숙해 계셨으나, 우리의 생각들은 그것들과 이토록 커다란 타인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받으셔야 할 고난과, 자신이 받아야 할 저 피비린내 나는 세례에 대해 자주 생각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50). 그리고 그분은 사전에 자신의 고난을 염두에 두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고 고백하던 자들 중 일부가 땅 위의 형통과 안식에 대한 기대로 스스로를 기만하며 헛된 상상과 허황된 공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감지하셨을 때, 그들의 생각을 이 덜 즐거우나 더 필연적인 주제, 곧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위해 받아야 할 고난들로 돌려놓으셨습니다. 땅 위의 권세가들처럼 자신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저 어리석고 근거 없는 질문에 답하시는 대신, 그분은 그 질문자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시며 덜 즐거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마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으려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말하자면, '너희는 그러한 허황되고 부질없는 꿈들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을 뿐이요, 하나님의 작정들 안에는 너희를 위해 마련된 다른 일들이 잘려 나와 있도다. 보좌와 재판석 위에 앉는 것을 생각하는 대신, 내 이름 때문에 죽기 위해 그 도장과 선고를 받으러 죄수처럼 그 전면에 끌려올 것을 생각하는 것이 너희에게 마땅할 것이니, 이러한 생각들이 너희에게 훨씬 더 많은 유익을 끼칠 것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2. 이러한 묵상들이 우리를 더 잘 친숙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환난과 어려운 일들이 임할 때 그것들과 마주할 준비를 더 잘 갖추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준비성과 예비성은 우리의 두려움들을 굴복시키고 몰아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는 일에 대해서는 결코 크게 공포에 질리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의 차이는, 완전한 갑옷을 입고 자신의 원수를 향해 모든 면에서 준비를 갖추고 있는 군사와, 원수가 자신의 침실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와중에 옷은 이 장소에 두고 무기는 저 장소에 둔 채 침대 위에서 경보를 전해 들은 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에베소서 6장 13-15절에서 우리에게 이토록 간절하게 권면한 것은 가장 무게 있는 이유가 없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발에 신을 신고."
우리는 사도행전 21장 13절에 나오는 저 용맹과 견고함의 거대한 본보기 속에서 고난을 위해 이와 같이 미리 내다보고 준비를 갖추는 일의 유익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준비되었노라(ready)."
그리고 동일한 용맹과 견고함이 그가 바로 그 경기장에 들어서며 자신의 목을 단두대 위에 내려놓으려 하던 때에도 그 안에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딤후 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여기에서 '부어지고'에 해당하는 단어인 스펜도마이(σπένδομαι)는 본래 제주(libation) 혹은 전제(drink-offering)를 의미하니,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그가 칼에 의한 죽음이라는 자기 자신의 구체적인 죽음의 종류를 암시한 것이라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의 마음은 제사장들이 여호와께 전제를 부어 드리던 것만큼이나 기꺼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피를 쏟아부을 수 있는 상태로 인도되어 있었습니다.
진실로 우리가 하는 이 세상의 모든 묵상들과 준비들이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어려운 사역들을 통과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공상이 먼 거리에서 묘사해 내는 죽음을 보는 것과, 죽음 그 자체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려진 사자는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으나, 살아 있는 사자는 우리를 떨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난을 견디는 힘이 우리 자신의 준비나 죽음에 대한 사전 생각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넘치는 도우심으로부터 오는 것일지라도, 대개 그분의 그러한 도우심은 이러한 수단들을 양심적이고 겸손하게 사용하는 과정 속에서, 그리고 그 수단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고난을 받기 위한 힘과 인내와 결단들을 바라며,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전달하기를 기뻐하시는 그러한 수단들을 매일 진지하게 사용하는 중에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로 발견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지침은 잠언 16장 3절의 성경 말씀에 의해 온전히 확증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경영을 얻으리라(네 생각들이 확립되리라)."
위험의 때에 우리가 겪는 고통과 짐의 가장 큰 부분은 우리 자신의 생각이 정돈되지 못하고 심란해지는 데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가라앉히고 고요하게 만드는 방법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 지침은 우리가 죽음 그 자체를 마주하러 갈 때, 그것도 죽음의 그 모든 두려운 형식들과 가장 무시무시한 모양새 속에서 마주하려 할 때 바로 이 목적과 취지를 위해 적용되어야 합니다(베드로전서 4장 19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만약 믿음으로 의탁하는 이 행위가, 생각이 가장 큰 혼란 속에 있고 두려움이 온전한 힘을 떨치고 있을 것으로 상정되는 그러한 때에도 이토록 유익하다면, 그보다 더 작은 환난들 속에서는 마음을 확립하고 그 격정들을 가라앉히는 데 훨씬 더 많이 역사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재산을 두고 법정에 계류 중인 소송을 겪고 있고, 그 결과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으로 마음이 과부하에 걸려 심란해하고 있을 때, 여러분이 매우 유능하고 신실하다고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그러한 때에 여러분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해 준다면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안식과 구제가 될지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더 이상 여러분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이 문제 때문에 단 한 시간도 잠을 설치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저 무관한 목격자가 되시고, 이 일을 내게 맡기며 나를 신뢰하고 그 경영을 위임하십시오. 내가 그것을 내 자신의 일로 삼아 당신에게 아무런 해가 없도록 구제해 주겠나이다."
오! 여러분이 이와 같이 그 일을 그러한 손에 양도하고 맡겼을 때,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게서 얼마나 커다란 짐과 무거운 하중이 덜어지는 것을 느끼겠습니까! 그때에야 여러분은 즐겁게 음식을 먹고 고요함 속에 잠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두려움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안식과 고요함을 주니, 참으로 그분의 권세와 지혜와 신실하심이 인간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보다 더 거대하신 만큼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지침을 악한 날에 마음의 평강과 고요함을 위해 실천 가능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다음의 사항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연적일 것입니다.
1. 믿음으로 맡기는 이 행위의 성격과, 그것이 그 안에 상정하거나 내포하고 있는 바를 잘 연구하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은 아니요, 오직 그분의 백성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무엇이든 다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 자신을 그분의 돌보심과 보호하셨음에 맡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길들 안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아십시오.
"당신은 이제 당신의 자녀와 관련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자녀가 처한 이 극심한 상황 속에서 그분께 자녀의 생명을 구하겠습니까, 아니면 죽음을 구하겠습니까?"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의탁하나이다."
그러자 그녀의 친구가 말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것을 당신의 선택에 의탁하신다면, 당신은 그때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이에 그녀가 말하기를,
"아, 참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그것을 내게 의탁하신다면, 나는 기필코 그것을 다시 하나님께 의탁하겠나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고통스러운 염려들을 주님께 진정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두려움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이로써 양보된(복종된) 뜻의 평강과 위로를 누릴 수 있는 어떠한 근거들과 격려들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처지가 아무리 어렵고 두려울지라도 여러분 앞에는 두 가지 종류의 격려가 놓여 있으니,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충분한 격려를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얼마간의 격려, 곧 그분과 맺어진 여러분의 관계와 그분에 대한 경험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더 많이 죽어 있을수록(mortified), 여러분은 더 적게 공포에 질릴 것입니다(terrified). 우리의 마음을 그러한 두려움과 떨림 속에 밀어 넣는 것은 죽은 세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그것들은 곧 고요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에 그토록 많은 힘을 실어 주는 것은 바로 우리 애착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군사의 삶에 비유한 것은 매우 거대한 이유가 없지 아니한 것이니, 군사가 만약 진영을 따르고 전투에서 용맹하게 자신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자기 생업의 일들에 얽매이지 아니해야 합니다(디모데후서 2장 4절). 진실로 세상으로부터 얽매임이 풀린 마음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의 진영을 따를 수 있는 길이 없으니,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에 대한 우리 사랑의 열정에 비례하여 그것들에 대한 우리 두려움의 힘과 높이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안위 없는 볼품없는 두려움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다음의 것들에 대한 과도한 존중과 사랑을 향한 여러분의 애착을 죽이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수단들을 활용하십시오.
가장 가난했던 시대가 가장 부요한 그리스도인들과 가장 고결한 순교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짐을 가장 깊이 실은 배들이 전투를 치르기에는 가장 좋지 못합니다. 믿는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에게 하늘에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을 스스로 앎으로 자신들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히 10:34). 그들은 진짜 소유주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관한 목격자들처럼 처신했습니다. 그들은 무지한 군인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실어 나갈 때, 마치 수많은 친구들이 그것들을 안으로 들여와 주는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겠습니까? 오직 하늘에 고정되고 땅 위의 일들에 대하여 죽은 마음에 기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틀림없이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이 세상에서 더 안락하게 편의를 누리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로 여기고 가치 있게 평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을 분명히 가장 낮고 비천한 계층과 성격의 자비로 여겼던 것으로 보이며, 오! 우리 역시 그것들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늘에 쌓아 둔 소유는 더 나은 소유였으므로, 그것이 안전하게 있는 한, 이것의 상실은 그들을 괴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짧은 시간 동안 자신들에게 생기를 공급해 준 이러한 일들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으나, 그것들이 일시적인 누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 원수들이 그것들을 만지지 않았을지라도 스스로 날개를 만들어 날아가 버릴 것들이라는 점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하늘에 쌓아 둔 소유, 그것은 영구한 소유였습니다. 그러한 땅 위의 일들이 자신들을 하늘의 일들로 나아가도록 촉진해 줄 수 있는 한에서는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가치 있게 보았으나, 만약 사탄이 그것들을 함정과 시험으로 바꾸어 하늘에 있는 자신들의 더 나은 소유를 박탈하려 든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손쉽게 가벼이 여겼고 그것들을 빼앗기는 것을 기쁘게 당할 수 있었습니다.
악천후 속에서 폭풍으로 인해 배가 가라앉고 침몰할 위기에 처했을 때, 모든 손길은 가장 값비싼 물건들을 배 밖으로 던져 버리는 일에 신속하게 동원됩니다. 그 누구도 그것들을 내버리는 것이 아깝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러한 처지 속에서 이성은 인간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내가 이것들과 함께, 그리고 이것들 때문에 파멸하는 것보다, 이것들이 파멸하는 것이 더 낫도다.'
이러한 물건들이야말로 어떤 이들이 배 밖으로 던져 버리기를 거부하는 상품들이며, 그렇기에 그것들이 인간들을 파멸 속에 침몰시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딤전 6:9). 데마는 이러한 것들과 결별하기보다는 차라리 파멸하는 쪽을 택했습니다(딤후 4:10). 그러나 독자여, 당신이 그것들을 하늘과 영광의 모든 소망을 맞바꾸어 팔아 버린 대가로 바라보아야만 할 때, 그것들이 당신에게 대체 무슨 위로를 건넬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려하십시오. 그것은 피의 대가가 유다에게 건네준 위로만큼이나 미미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약 당신의 죽지 아니한 마음이 유다의 마음처럼 그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과열된다면, 그것들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릴 것입니다.
자유는 공중의 새들에게조차 갈망할 만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은 새장 안에서 새들에게 아무리 좋은 편의를 제공하고 가장 값비싼 먹이를 먹일지라도, 그 새들은 여러분의 집 안에서 살찌고 따뜻하게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숲속에서 자신들의 자유와 함께 춥고 배고픈 쪽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가 그토록 달콤할지라도, 처해진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을 지키는 것보다 그것과 결별하는 것 속에 더 많은 위로와 달콤함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감옥의 문들이 여러분을 안으로 가둘 수는 있을지언정, 보혜사(the Comforter)를 밖으로 몰아내어 가둘 수는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들의 자유를 잃었으나, 그것과 함께 자신들의 위로를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발이 차꼬에 든든히 채워졌을 때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진정으로 자유로웠으며, 죄수의 식사를 먹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맛있게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옥 안에서 그들을 위해 상을 차려 주셨고, 풍성한 잔치를 보내 주셨으며, 참으로 그들의 잔치에는 음악도 있었으니 그것도 한밤중에 그러했습니다(행 16:25).
밧모는 황량한 섬이었고 유배된 자들을 위해 고안된 장소였습니다. 그 섬은 소아시아 해안에서 멀지 않은 에게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 섬은 심각한 황량함으로 인해, 형벌을 받도록 지정된 자들 외에는 그 누구도 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요한은 황량한 바위들이나 그 섬에 살도록 정죄받은 야만적이고 절망적인 인간들이 제공할 수 있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땅 위의 생기도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바로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 표현할 수 없는 영광 중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저 가슴 벅찬 환상들을 보았고, 이 세상의 통치 속에 나타난 섭리의 온전한 체계를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거룩한 성 새 예수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으니,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밧모 섬을 낙원(Paradise)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어떤 장소도 그에게 이와 같은 위로를 건네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와 위로 사이에 그토록 엄격하고 필연적인 결속이 있어서, 첫 번째 것을 빼앗아 가는 자가 필연적으로 다른 것까지 박탈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상정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너무나 애지중지한나머지 그것을 위해 진리와 선한 양심을 맞바꾼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것을 그토록 쓰라리게 만드실 수 없겠습니까? 참으로, 그분께서 수많은 이들에게 그것을 그토록 쓰라리게 만드셔서 그들이 신속하게 그것에 신물 지어 하고 그것을 감옥과 바꾸는 기회를 기쁘게 여기도록 만드신 적이 없으십니까? 우리 자신의 순교록(Martyrology)이 이에 대한 많은 슬픈 예들을 우리에게 공급해 줍니다.
오, 여러분의 평강이 속사람으로부터 박탈당했을 때, 여러분은 그 쓰라리고 비싸게 치러서 산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감옥 속에 가두어 버리시고 여러분의 양심을 그분의 결박과 착고 속에 집어넣으실 때, 여러분은 순교자가 말했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감옥에 갇히기까지는 감옥에 있는 것이로다(내가 감옥에 투옥되기 전까지는 내 영혼이 감옥에 갇힌 상태로다)."
이성적인 사고를 통하여 당신 자신의 생명을 더 낮은 가치로 평가하도록 이끄십시오. 내가 보기에 여러분에게는 이 지점에서 여러분의 눈먼 애착을 치료할 증거들이 충분합니다. 여러분은 지나온 삶의 분량만큼, 그것이 당신에게 그토록 즐거운 삶이었다고 결론지었습니까? 사도가 고린도후서 5장 4절에서 그것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그리하여 짐 지고 탄식하는 삶이 그토록 갈망할 만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또한 그가 다음 구절에서 말하듯이, "우리가 몸에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압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따로 떨어져 있는 상태가 그분을 사랑하는 영혼에게 그토록 갈망할 만한 것입니까? 집으로부터 이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많은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겠으나, 진지하게 회상해 본다면, 여러분은 결코 사탄의 시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요, 결코 여러분 자신의 내주하는 부패들로부터 자유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전투들은 생명이 끝나기 전까지는 끝을 맺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여러분이 죽기 전까지는 여러분의 영혼이 만족을 얻을 수 없고 여러분의 갈망들이 안식 속에 머물 수 없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방식과 의무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그 어떤 위로들을 취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은 여전히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으며, 여전히 하늘을 향해 인력에 끌리듯 숨 가쁘게 갈망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자신들이 죽어야만 한다는 것과 자신들이 떠날 기약이 가까웠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죽음들 중에서, 만약 여러분이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폭력적인 죽음(순교)만큼 하나님께 가장 영광이 되고 여러분에게 이토록 분명한 증거와 위로가 될 만한 죽음은 없습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은 필연성과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의와 선택에 의해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한 공적인 증언을 세우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의 피가 쓰임받거나 명예로워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용도입니다. 그리고 고통과 토막 고문에 관하여는 순교자가 말했듯이, '내 고통을 감해 주는 자는 내 상급을 감하는 자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자연사보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더 수월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극심한 곤경 속에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이요, 다른 인간들은 맛보기를 기대할 수 없는—적어도 통상적으로는 그러하니, 그것들은 그러한 자들을 위해 그러한 시간을 대비하여 예비되고 보존된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한 소생시키는 영약(cordials)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의 마음 위에 그러한 죽이는(mortifying) 고려사항들을 역사하게 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을 몰아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한 번이라도 이 지점을 얻어 낸다면, 여러분은 가장 소스라치게 놀랍고 두려운 시대 속에서도 여러분 마음의 안식과 평안함 가운데 여러분의 모든 수고와 기도들이 풍성하게 응답받는 것을 신속하게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를 사면으로 에워싸고 있는 저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을 바라보십시오. 이스라엘인들을 인도하기 위해 그들 위에 머물렀던 저 구름과 같은 구름이요, 참으로 여러분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격려하기 위한 탁월한 자들의 허다한 무리로 이루어진 구름입니다(히 12:1).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약 5:10). 얼음을 깨뜨리고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다져 놓은 탁월한 자들의 본보기들은, 우리 자신의 마주함 속에서 우리의 두려움을 억누르고 우리의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데 탁월한 유익을 줍니다.
최초의 고난을 받았던 자들이 가장 힘겨운 과업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최초로 경기장에 들어섰던 자들은, 자신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저 두려움을 억누르는 도우심들을 결여하고 있었습니다. 생소하고 겪어보지 못한 고문들이 가장 두려운 법이니, 왜냐하면 magnitudinem rerum consuetudo subducit(익숙함이 일들의 무시무시한 거대함을 감해 주기 때문)로, 겪어보고 친숙해지는 것이 악의 두려운 거대함을 꺾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맞서 싸워야 할 원수의 힘을 알지 못했으나,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간 우리 형제들에 의해 자주 패배하고 정복당했던 원수와 싸우는 것입니다.
확실히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들의 두려움을 굴복시키기 위한, 그 어떤 이들이 가졌던 것보다 가장 좋은 도우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부름받을 수 있는 것만큼이나 혹독한 용기의 시험들 속에서 우리 형제들이 보여준 용기와 견고함에 대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인 다운 당당함(gallantry)으로 모든 종류의 고난들과 고문들을 이겨내고 승리했던 바를 읽어왔으며, 그들이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도록 속사람 안에서 모든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었던 바를 읽어왔습니다(골 1:11). 그들은 자신들을 정죄하고 처벌했던 법정으로부터 걸어 나오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받는 일(dishonoured)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은 것(honoured)을 기뻐했으니, 그 본문의 엄격한 독법에 따르면 그러합니다(행 5:41).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그 당시에는 부에 있어서 세상의 병기창과 같았던 곳이었습니다—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히 11:26).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6-37). 이 모든 일 속에서 그들은 좋은 증거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승리하는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전장으로부터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최초의 출발 시점에 나타난 과열된 열정의 결과물이 아니었으며, 후대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고문자들을 향해 일종의 즐거운 조롱과 고문에 대한 경멸을 던지는 동일한 용기의 정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진실로 대제(the Great)라 불렸던 바실(Basil)이 그러했으니, 발렌스(Valens) 황제가 거대한 분노 속에서 그에게 유배와 고문으로 위협했을 때, 첫 번째 것에 대하여 그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거의 개의치 아니하노니,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이요" 하였고, 고문들에 대하여는 "나와 같이 가죽과 뼈밖에 남지 않은 이 불쌍하고 가냘픈 몸 위에 그것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때에, 폰투스의 총독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가 거대한 분노 속에서 그에게 자신이 그의 창자로부터 그의 간을 쪼개어 내겠다고 말했을 때, 바실이 진실로 말하기를, "당신은 내게 매우 좋은 일을 해 주는 것이니, 내 온몸을 달구고 병들게 만드는 내 못된 간을 꺼내 주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의 원수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잔혹함과 위협들을 보고 미소 지음으로써 자신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사랑은 고난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너무나 온전하게 극복한 나머지, 그가 사자들과 표범들 사이에 노획물로 던져지기 위해 가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그들 사이에 있기를 갈망한다고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그것들이 나를 더 속히 처치해 주지 아니한다면, 내가 내 달콤하신 예수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내가 그것들을 도발하겠노라."
그리고 우리가 더 후대로 내려올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그토록 강건한 용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루터(Luther)의 용기와 꺾이지 않는 담대함은 그리스도교 세계 전역에 나팔 소리처럼 울려 퍼져 있습니다. 그것은 이 작은 책자를 너무 비대하게 만들 것이나,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용기의 가장 탁월한 사례들을 주목해 보자면, 그가 남긴 마지막 사례는 그의 마지막 질병 속에서 자신이 자신의 피를 무덤까지 지니고 가야 한다는 점(순교하지 못한다는 점)으로 인해 슬퍼했던 일이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영웅적인 정신이 그와 함께 종교개혁의 동일한 대의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던 여러 귀하고 탁월한 인물들 속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이 목적에 부합하는 주목할 만한 사례는, 보름스(Worms)에 집결한 추기경들과 주교들을 대적하여 루터의 대의를 변호하기 위해 독일의 기사였던 울리쿠스 압 후텐(Ulricus ab Hutten)이 작성한 저 유명한 서한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대적하여 내가 착수한 바를 끝까지 관철할 것이요, 인간들을 충동하여 그들의 자유를 구하게 할 것이라. 처음에 내게 굴복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내가 끈질김으로 이겨낼 것이요, 내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개의치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아니하노니, 두 가지 결말 모두에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 곧 내 조국의 거대한 유익을 위하여 여러분을 파멸시키거나, 아니면 내 자신이 선한 양심을 품고 쓰러지는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큰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의 위협들을 경멸하는지 여러분이 볼 수 있도록, 여러분이 루터와 그와 같은 자들을 박해하는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여러분의 화해할 수 없는 원수로 선포하노라. 여러분의 그 어떤 권세도, 운명의 그 어떤 상해도 내 안에서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할 것이니, 비록 여러분이 내 생명을 빼앗아 갈지라도 내 조국의 자유를 향한 나의 이 가치 있는 헌신은 죽지 아니할 것이라. 나는 여러분과 같은 자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합당한 사역자들을 세우려는 나의 노력이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일임을 아노니, 마지막 심판 때에 여러분의 은총을 입은 것보다 여러분을 노엽게 한 것이 내게 훨씬 더 안전할 것임을 확신하노라.'
작가가 말하듯이 조정과 로마의 모든 은총과 제안들, 그리고 죽음 그 자체의 공포들을 경멸하면서 세 차례의 공적인 제국 회의 속에서 모든 마귀들과 교황을 대적하여 종교개혁의 편에 나타났던, 작센의 선제후 존(John duke of Saxony)을 움직여 종교개혁을 변호하게 만들었던 것 역시 용맹하고 영웅적인 정신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면전에 공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든지 세상을 섬기든지 해야 하거늘, 여러분은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루터의 설교들이 금지당하자마자, 그는 신속하게 떠나며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섬길 내 자유를 가질 수 없는 그곳에는 머물지 아니하겠노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독자여, 당신은 당신이 고난받기를 두려워하는 그 대의를 변호하기 위해 당신보다 앞서갔던 저 가치 있는 자들의 용기와 열정을 조금 맛보았습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말하기를, 그러한 본보기들을 읽거나 듣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로마의 검투사들을 바라보는 목격자들과 같아서, 곁에 서서 그들의 용기를 칭찬하기는 하나 그들이 행했던 바를 행하기 위해 감히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지는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를 위한 그와 같은 용기를 얻고자 한다면, 이와 같이 유명한 본보기들을 발전시키십시오.
이것이 명확할수록, 여러분은 더 담대해질 것입니다. 확신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고난 속에서 겁쟁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분깃과 그분으로 말미암는 죄 사함에 대한 의구심들이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두려움들로부터 명확해지는(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증거들을 흐리게 만드는 것보다 우리의 두려움을 더 강화시키는 것은 발견되지 않으며, 우리의 증거들을 명확하게 만드는 것보다 우리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치료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것은 신속하게 우리의 마음을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자랑하는) 정신으로 채워 줄 것입니다(롬 5:5). 믿는 히브리인들이 한 번 자기들에게 하늘에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땅 위의 위로들을 상실하는 것에 대하여 자기 안에 무관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음을 신속하게 발견했습니다(히 10:34).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의 죽음은 말할 수 없는 유익이나, 만약 인간이 죽음을 통해 가장 극대화된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의 유익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여러분에게 보여주기 위해,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그 유익이 합산되어 나타나는 몇 가지 구체적인 사항들을 달아봅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고 확신하는 자는 다음의 사항들을 압니다.
2. 자연사(自然死)를 통해서 우리는 단지 죄의 피할 수 없는 결과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뿐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폭력적인 죽음(순교)을 맞이할 때, 우리는 죄의 악함에 대항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진리들을 위하여 우리의 증언을 세우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마땅히 치러야 할 공의의 빚을 갚는 것이요, 두 번째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께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와 순종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죄의 문제에 있어서 고난을 받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증인들이 됩니다. 첫 번째 죽음에서는 죄가 우리에 대항하여 증언하지만, 이 죽음(순교)에서는 우리가 죄에 대항하여 증언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이것은 죄의 악함에 대항하는 거대한 증언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을 향해, 지하 감옥이나 피 묻은 도끼, 혹은 삼켜 버릴 듯한 불길 속에 있는 악이 죄 안에 있는 악만큼 크지 않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진리들과 선한 양심을 버리는 것보다, 우리의 육신적인 친구들, 재산들, 자유들, 그리고 생명들을 잃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는 츠빙글리(Zuinglius)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선택하지 못할 죽음이 어디 있으며, 그가 차라리 겪지 못할 형벌이 어디 있겠는가? 참으로, 진리와 양심에 대항하여 증언하기보다는, 차라리 지옥의 어떤 굴 속으로 던져지기를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3. 그리스도 안에서 맞이하는 자연사가 우리 자신에게는 똑같이 안전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해 맞이하는 폭력적인 죽음은 다른 이들에게 훨씬 더 유익할 것입니다. 전자를 통해서는 우리 자신이 하늘에 이르게 되겠지만, 후자를 통해서는 수많은 영혼들을 그곳으로 인도하게 될지 모릅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진실로 교회의 씨앗이라 불립니다. 수많은 이들이 바울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담대해졌으며, 그의 고난은 도리어 복음의 진전을 가져왔고, 우리의 고난 역시 그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그리스도인은 삼손과 같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보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사탄과 그의 대의를 대적하여 더 큰 봉사를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단지 침상 위에서 자연사를 맞이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만이 그리스도의 진리들을 소유한 채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자로 죽는다면, 우리는 다가올 세대들에게 그 보배로운 유산이 이어지도록 보장하는 것이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뿐만 아니라, 그 진리가 자신들을 위해 보존되고 전수될 수 있도록 기여한 우리의 용기와 열정, 그리고 견고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여러분은 신자에게 죽음이 거대한 유익이라는 점을 보게 됩니다. 그가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죽기만 할지라도 거대한 유익이며, 만약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도 죽는다면 그 모든 것에 더하여 훨씬 더 많은 유익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든 죽음을 통해 그러한 유익을 얻을 것임을 확신하는 자는, 그러한 확신 앞에서 죽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들이 쪼그라들어 사라지는 것을 필연적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그는 차라리 인내함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갈망함으로 죽음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는 잠잠히 복종할 뿐만 아니라, 이토록 영예로운 직무에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는 것을 지극히 기뻐할 것입니다. 확신은 피 묻은 죽음을 홍해를 통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는 안전한 통로라 부를 것입니다. 그것은 이러한 도구들을 충동질하는 사탄과, 사탄에 의해 그러한 피 묻은 일에 고용된 모든 자들을 향해, 저주하기 위해 불려 왔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지 않고 도리어 축복하는 수많은 발람들이라 부를 것입니다. 확신을 얻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죽음을 자신의 결혼 날로 바라봅니다(계 19:7). 그러므로 자신을 그리스도께로 데려가기 위해 보내진 말이 청황색 말이든, 홍색 말이든 크게 다르지 않으니, 그가 이그나티우스가 불렀던 것처럼 자신의 사랑이신 그리스도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러합니다.
그는 죽음을 감옥으로부터 놓여나는 석방의 날로 바라봅니다(고후 5:8). 그리고 어떤 손이 문을 열든, 혹은 친구가 감겨 주든 원수가 그의 눈을 감겨 주든 커다란 차이가 없으니, 그가 자신의 자유를 얻고 그리스도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러합니다.
오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여러분의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안식을 얻기까지 주님을 쉬지 못하시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담대하게 주님은 나를 돕는 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여러분은 그 뒤에 즉각적으로 따르는 말씀, 곧 내가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무서워하지 아니하노라(히 13:6) 하는 말씀을 신속하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의 마음이 정직하다면, 어찌하여 당신이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겠습니까? 온전한 확신은 가능한 것이며,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이 명령 속에 두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벧후 1:10). 인치는 은혜들이 여러분 안에 있고, 인치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행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인치는 약속들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부지런함을 내지 않기 때문에, 그 위로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힘쓰며, 우리의 마음을 더 엄격한 파수함으로 지키고, 죄를 더 철저히 죽이며, 하나님 앞에서 더 정확하게 행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속히 이 복된 확신에 도달하겠으며, 그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종노릇하는 두려움들에 대한 탁월한 치료제를 얻게 되겠습니까.
올바름은 우리에게 담대함을 줄 것이요, 순결함은 우리에게 평강을 안겨 줄 것입니다. "공의의 일은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 32:17). 두려움이 죄책과 간사를 따르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평강과 조용함은 공의와 신실함을 따릅니다(잠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그의 확신이 거대한 이유는 그의 양심이 조용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평강이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환난 중에서 용기의 정점에 이르기까지 올라서는 세 가지 주목할 만한 단계가 존재합니다(롬 5:1, 2, 3, 4). 첫째로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 죄책으로부터 벗어납니다(1절). 그다음 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은혜와 용납하심의 상태 안으로 들어갑니다(2절). 거기로부터 그들은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니, 심지어 하늘과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에 이릅니다(3절). 그리고 거기로부터 그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자랑하는) 단계로 수월하게 발걸음을 옮깁니다(4절).
내가 말하거니와, 그것은 수월한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한 번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 믿음으로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는 조망과 전망을 소유하게 된다면, 그러한 상태 속에서 환난 중에 승리를 외치는 것은 너무나 수월하여, 그것을 막아서는 것은 마치 사람이 간지럼을 탈 때 웃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점이 발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언제나 용기와 위로의 샘이라는 점을 발견해 왔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고전 1:12). 그들의 마음은 종교 안에서 품은 사사로운 목적들로 인해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양심은 자신들이 어떤 육신적인 계획을 덮기 위한 구실로 종교를 옷 입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고백한 바에 있어서 신실했다는 점을 증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내용물 없이 불 위에 올려진 질그릇은 금이 가고 산산조각이 날 것이며, 위선적이고 형식적이며 단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견고하고 실제적인 용기의 원리들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자는, 시험을 견뎌낼 것이며 불길로 인해 결코 나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방인들조차 도덕적 정직함의 유익과, 환난의 때에 그것이 자신들의 본성적인 양심에 안겨 준 평강을 발견했습니다.
Nil conscire tibi, nulla pallescere culpa, Hic murus aheneus esto. (네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 없고, 그 어떤 죄책으로도 창백해지지 않는 것, 이것을 네 놋 벽으로 삼으라.)
그것은 그들에게 놋 벽과 같았습니다. 하물며 경건한 신실함과, 우리의 양심 위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는 얼마나 더 우리의 마음을 안전하게 지키고 격려하겠습니까! 이 무신론적인 시대는 양심과 순결함을 비웃고 조롱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비웃게 두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울부짖을 때 당신을 웃게 만들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그것을 자신의 본업으로 삼았노라)" (행 24:16)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수고에 대하여 풍성한 가치가 있었으니, 그의 인생의 모든 환난들—그것들은 크고 많았습니다—속에서 그것이 그에게 안겨 준 평강과, 용기와, 위로 속에서 만 배나 넘치게 보상해 주었습니다.
양심은 그 위에 짐이 놓여야만 하는 짊어지는 어깨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죄책으로 말미암아 허물어지거나, 죄 속으로 떨어짐으로 인해 탈골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러한 어깨 위에 짐을 지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여러분의 짐을 져 주기는커녕, 여러분은 그 양심의 통증과 괴로움을 감당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을 신중하게 예방하기 위해, 다음의 규칙들을 준수하십시오.
기록된 경험들은 탁월한 치료제들입니다.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출 17:14). 그 기록 속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아말렉을 대적하여 얻은 승리와, 끊임없는 기도를 통하여 그것을 얻어낸 방식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두려움들 속에서 자신들의 유익과 도움을 위해 이 자비를 확보하기 위해 수행되어야 할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기록되어야 하고 외워 들려야 한다는 것, 즉 망각으로부터 보존되어야 하고 구제를 위해 적시에 꺼내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경험에 의해 두려움에 대적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특별한 도우심이 있습니다.
1. 경험은 고난의 공포를 크게 경감시켜 주며, 고난을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덜 무시무시하고 덜 두렵게 만들어 줍니다. 두려움은 말하기를, 그것들은 거대한 물들이라 우리를 침몰시킬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경험은 말하기를, 그것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얕아서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곳이라 합니다. 다른 이들이 건넜고, 우리 역시 홍해를 통과할 수 있으며 휩쓸려 가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두려움은 말하기를, 죽음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롭고 쓰라리며, 살아 있는 자들은 죽어가는 자들이 느끼는 바를 거의 알지 못한다 합니다. 또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감옥에 갇혀 잔인한 죽음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악이라 합니다. 경험은 우리의 마음을 낙담하게 만드는 이러한 모든 거짓 보고들에 대적하니, 이는 두 번째 정탐꾼들이 첫 번째 정탐꾼들의 기를 죽이는 이야기들을 반박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경험은 우리에게 감옥과 죽음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그것들에 실제로 다다를 때에는 멀리서 보이고 나타나는 저 모습과 같지 않다는 점을 확신시켜 줍니다.
오, 이러한 일들을 조사하고 겪어본 저 신실한 이들이 얼마나 좋은 보고를 남겨 주었습니까! 그들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내려가 보았고, 감옥 안에 그리고 죽음 그 자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았으며, 자신들이 보이고 들리는 곳에 있는 동안에는 말이나 기호들을 통해 그것에 대한 우리의 거짓 관념들을 반박할 수 있었던 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오, 폼포니우스 알제리우스(Pomponius Algerius)가 프랑스 리옹의 고약한 냄새가 나는 감옥 속에서 얼마나 달콤한 고백을 남겼습니까! 그가 그곳에 있는 동안 자신의 모든 편지들의 날짜를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리옹 감옥의 즐거운 과수원으로부터.' 그리고 베네치아로 이송되었을 때, 그곳의 감옥으로부터 온 편지 속에서 그는 자신의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거의 아무도 믿지 않을 만한 바를 발하려 하노니, 내가 사자의 내장 속에서 꿀벌의 집을 발견했으며, 깊고 어두운 지하 감옥 속에서 기쁨의 낙원을 발견했고, 슬픔과 죽음의 장소 속에서 소망과 생명의 고요함을 발견했노라. 오! 바로 이곳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과 영광의 영이 우리 위에 머무시는 곳이로다.'
우리 자신의 순교자인 저 복된 필포트(Mr. Philpot) 씨 역시 그의 달콤하고 격려 넘치는 편지들 중 하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내가 영원한 복락에 이토록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로 인해 내 마음이 얼마나 기뻐 뛰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거대한 영광에 대한 나의 감사치 못함과 합당치 못함을 용서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나는 가장 비참한 죄인인 나를 위해 예비된 저 상급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기쁨을 가지고 있어서, 비록 내가 어둠과 애통의 장소에 있을지라도 애통해할 수 없으며, 밤낮으로 마치 그 어떤 십자가 아래에도 있지 않은 것처럼 이토록 즐겁습니다. 내 평생의 모든 날들 중에 나는 이토록 즐거웠던 적이 없었으니, 주님의 이름이 찬양받으실지어다.'
다른 이들은 불길의 한복판에서도 자신들과 친구들 사이에 합의된 신호들을 보내어, 그리함으로써 마지막까지 이 진리, 곧 하나님께서 고난의 내부를 감각에 나타나는 고난의 외형 및 겉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진리를 확증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다른 이들의 경험은 여러분에게 고난의 공포들을 경감시켜 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양심적으로 고난을 받았던 그 어떤 자리에서든 여러분 자신들이 직접 가졌던 하나님의 지탱해 주심과 위로하심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온전히 확증됩니다.
2.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의 믿음에 특별한 도우심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경험과 다른 이들의 경험은, 마치 아론과 훌과 꼭 같아서, 한편과 다른 편에서 믿음의 손을 붙들어 주어, 여러분의 두려움들이 저 아말렉 사람들과 같이 여러분 앞에서 쓰러지는 동안 그 손들이 아래로 처지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다름 아니라 신성한 약속들을 감각과 체감의 시험대로 끌어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험과 실험 없이도 약속들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지만, 이토록 많은 시험들을 거친 후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수월합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기록되고 적시에 적용된 여러분 자신의 경험과 다른 이들의 경험은, 고난의 날에 여러분의 믿음을 위한 양식이 될 것이요, 여러분의 많은 두려움들에 대한 치료제가 될 것입니다.
가련하고 겁 많은 영혼들이여! 마귀들과 인간들이 그 아래 복속되어 있는 왕, 최고의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통치의 고삐를 자신의 손에 쥐고 계시지 않습니까?(마 28:18, 빌 2:9-12, 요 17:2). 그리스도의 이러한 통치와, 모든 피조물들이 그분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잘 연구되고 믿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을 향한 우리의 신뢰와 인간을 향한 우리의 두려움 모두를 끊어내 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위로부터 받지 아니하였다면 우리를 돕거나 우리를 해할 그 어떤 권세도 지니고 있지 못함을 곧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들은 자신들의 교만 속에서 자신들의 권세를 과대평가하기 쉬우며,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 속에서 그것을 똑같이 과대평가하기 쉽습니다. 빌라도가 그리스도께 말하기를,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요 19:10) 하였습니다. 즉, '네가 내게 대답하기를 거부하느냐?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그렇다, 나는 네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그 어떤 권세도 지니지 못했을 가련하고 무력한 피조물임을 충분히 잘 알고 있노라. 나는 너를 아노라, 그러므로 너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노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자신의 자랑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쉬우며, 그들의 권세가 그들이 허망하게 소문내는 바와 같다고 믿기 쉽습니다. 반면 진실 속에서 우리의 모든 원수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붙들려 있으며(골 1:17), 그리스도에 의해 경계 지어지고 제한되어 있습니다(계 2:10). 섭리는 그들의 마음과 뜻 위에 즉각적으로 그 영향력을 미치시므로(렘 15:11, 시 106:46),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없으며, 그들의 손뿐만 아니라 그들의 뜻 역시 하나님에 의해 질서 지어집니다. 야곱은 라반의 손과 에돔(에서)의 손에 있었습니다. 둘 다 그를 미워했으나, 누구도 그를 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사냥감처럼 사냥했던 사울의 손에 있었으나, 사울은 그를 잠잠히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으며 그를 죽이는 대신 그를 축복했습니다. 멜란히톤(Melancthon)과 포메라누스(Pomeranus) 둘 다 카를 5세(Charles V)의 손에 떨어졌으니, 기독교 세계에 그보다 더 현명한 군주가 없었고 그리스도의 교회사에 그보다 더 맹렬한 원수가 없었으나, 그는 이 위대하고 활동적인 종교개혁가들을 부드럽게 대우했고, 그들을 자유롭게 석방해 주었으며, 그가 그토록 반대하고 미워했던 교리를 설교하거나 인쇄하는 것을 단 한 번도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오 그리스도인이여! 만약 당신이 당신의 두려움들 위로 올라서고자 한다면, 믿음으로 이러한 일들을 당신의 마음에 정착시키십시오.
3. 여러분은 지금까지 여러분의 평생의 모든 날들을 그리스도의 돌보심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지혜를 뛰어넘어 여러분의 길을 인도하신 한 지혜가 존재해 왔다는 사실(렘 10:23), 여러분 자신의 힘을 윗돌아 여러분의 무거운 짐들을 떠받쳐 주신 한 능력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시 73:26), 그리고 여러분 자신 이외의 곳에 존재하는 구제의 샘이 있어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셨다는 사실(눅 23:35)보다 더 명백한 진리는 없습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모든 일들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많은 약속들로 봉하시어, 시대가 아무리 위험할지라도 그들을 돌보시겠다고 보장하셨습니다(전 8:12, 시 76:10, 암 9:8, 9, 롬 8:28). 오! 만약 이러한 일들이 철저히 믿어지고 잘 선용된다면, 폭풍이나 구름이 저 높은 하늘의 영역을 어지럽힐 수 없는 것처럼, 두려움들이 더 이상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들거나 괴롭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섭리들과 약속들을 잊어버리며, 그리하여 그 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도록 우리 자신의 두려움들의 손에 공의롭게 내버려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법칙들을 제쳐두고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의 얕은 이성의 법칙으로 저울질하는 자는, 자기 스스로에게 도깨비(공포의 대상)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성이 모든 일을 판단하도록 허용되고, 둘째 원인들(눈앞의 수단들)의 외형과 나타남으로부터 이성 자체의 추론들과 결론들을 내리도록 용인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밤낮으로 안식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끊임없는 경보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 얼마나 이 법칙에 의해 일들을 재단하고, 하나님의 모든 계획들과 오묘한 섭리들을 이 이성의 법칙으로 판단하기 쉬운지요! 다른 일들에 있어서는 이성이 재판관이요 재판관이 되므로, 우리는 이곳에서도 이성을 그렇게 만들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성이 결론짓고 지시하는 바를 우리는 믿기 쉬운데, 왜냐하면 이성의 지시들은 그것이 정보와 소식을 수집하는 통로인 감각에 의해 뒷받침되고 지지를 받기 때문입니다. O quam sapiens argumentatrix sibi videtur ratio humana! "인간의 이성이 내리는 논증들과 결론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지혜롭고 강력해 보이는가!"라고 루터는 말했습니다. 이 육신적인 이성이야말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들을 그토록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주범입니다. 다음과 같은 일을 행하는 것이 바로 이 이성입니다.
이 모든 해악들은 우리 육신적인 이성의 과도한 활동들과 침범들에 그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결코 이와 같아서는 안 되며, 이것은 법칙을 벗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이성을 믿음에 양도하고, 약속들을 통하여 모든 일들을 바라보며, 모든 결과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종노릇하는 모든 두려움들을 치료하기 위해 본문 속에서 처방된 바이며, 참으로 죄악된 두려움들을 치료하기 위해 앞서 언급된 모든 지침들은 이 지침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이것으로 환원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Q1. 이 장에서 제시된 지침들 중, 눈앞의 세컨드 코즈(둘째 원인들/수단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위해 취해야 할 핵심 영적 조치는 무엇입니까?
Q2. 우리의 육신적인 이성 작용이 가져오는 '만약에(~if)'라는 절망적인 추론을 차단하고, 생각을 믿음의 통치 아래 두기 위해 일상에서 훈련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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