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플라벨, 죄로 물든 두려움 이기기
존 플라벨, 죄로 물든 두려움 이기기
인간에게서는 세 가지 종류의 두려움이 발견되니, 곧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연적 두려움은 공통된 인성을 나누어 가진 모든 자가 예외 없이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하는 두려움입니다.
자연적 두려움이란 다가오는 악이나 임박한 위험을 인지함으로부터 발생하는 마음의 고통이나 교란(perturbation)입니다.
‘두려움’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포보스(φόβος)는 ‘도망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두려움이 항상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죄의 열매요 결과입니다. 죄가 우리의 인성 안에 들어온 이래로, 두려움을 떨쳐버릴 길은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범죄하자마자 곧장 두려워하여 도망쳤고, 동산 나무 사이에 자신을 숨겼습니다(창 3:8). 그가 언약을 어겼을 때, 그는 즉시 저주의 집행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먼저 먹었고, 그다음에는 숨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격정은 그로부터 그의 모든 자손에게 전달되고 유전되었습니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육신으로 거하신 날들에 이 자연적 두려움에 자신을 복종시키기를 기뻐하셨으니, 그분은 두려워하셨고, 참으로 심히 놀라셨습니다(막 14:33). 비록 그분의 인성은 죄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셨으나,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롬 8:3).
이 두려움은 마음에 큰 고통과 교란을 만들어냅니다(요일 4:18). "두려움에는 형벌(괴로움)이 있음이라." 위험에 비례하여 두려움이 커지고, 두려움에 비례하여 마음의 고통과 산란함이 커집니다. 만약 두려움이 심히 크면 이성이 자리를 잃고 우리를 더 이상 인도하지 못하게 되니, 시편 기자가 폭풍 속의 선원들에 대해 "그들이 지각의 끝에 서 있도다(they are at their wits end)"라고 말한 바와 같으며, 혹은 그 난외주(margin)에 번역된 것처럼 "그들의 모든 지혜가 삼켜지는도다" (시 107:27)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명기 28장 25절의 의미이니, 곧 그들이 대적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갔으나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즉 그 공포와 산란함이 너무나 큰 나머지 그들이 이제는 이 길로, 다음에는 저 길로 시도하며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아도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이성의 조력을 너무나 멀리 배반하므로 그들의 도모는 항상 불확실함 속에 있고 갈 바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처지에 놓인 사람의 일반적인 음성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어느 길로 돌아서야 할지 모르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악(Evil)은 두려움의 대상이며, 악이 크면 클수록 두려움도 필연적으로 더 강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깨어나 공포에 질린 양심의 공포야말로 공포 중의 가장 큰 공포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인간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상대해야 하고, 그분의 무한하고 영원한 진노를 인지함으로 인해 떨게 되기 때문이며, 그 진노보다 더 크거나 클 수 있는 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싸움이 어느 정도의 극치에 달하셨을 때 그분으로 하여금 큰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게 하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모든 세상적인 악 중에서 죽음이 가장 크며, 그러므로 욥은 그것을 "무서움의 왕(King of terrors)" (욥 18:14), 곧 공포 중의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라 부릅니다. 투아누스(Thuanus)는 죽음의 두려움에 관한 두 가지 기이한 사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대장에 관한 것인데, 그는 죽음의 두려움에 너무나 공포에 질린 나머지 그의 온몸의 모든 부위로부터 일종의 피 섞인 땀을 쏟아내었다. 다른 하나는 식스투스 5세(Sixtus Quintus)에 의해 사소한 일로 사형 선고를 받은 한 청년에 관한 것인데, 그는 죽음의 두려움으로 너무나 격렬하게 공포에 질린 나머지 일종의 피눈물을 흘렸다."
이것들은 두려움이 낳은 기이하고도 두려운 결과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느끼시고 당하신 바에는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공포보다 훨씬 더 큰 악, 곧 격노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지체 없이 온전히 그분 위에 쏟아지는 엄중한 현실과 맞서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은 악 그 자체로서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미움의 대상입니다. 두려움을 격동시키고 이 사자를 깨우는 것은, 우리가 피하거나 모면할 길을 알지 못하는, 임박하거나 가까이 다가오는 악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영광 중에 있는 성도들은 모든 위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므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또한 여기에 있는 우리도 악의 한복판에 살아가면서도 그 악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것을 피할 길을 알지 못하기 전까지는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도의 화재나 전염병이나 칼의 소문을 듣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 못하는데, 그 악이 우리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멀리 있고 우리는 그것으로 인한 위험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사는 마을에 도달했을 때, 하물며 우리 자신의 처소 안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떨게 됩니다. 악은 단순히 그 본질을 인지함으로 우리를 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와 결합(union)됨으로 해합니다. 그리고 모든 근접함(propinquity)은 결합의 한 단계라고 한 학식 있는 신학자가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육신에 속한 안일함이 악을 우리로부터 먼 거리에 둠으로써 유지된다는 사실은 관찰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저 안일한 향락주의자들에 대해 아모스 6장 3절이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라고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그 의미는 그들이 실제로 악한 날을 단 1분이라도 자신들로부터 멀리 보낼 수 있었다거나 보냈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상상과 공상 속에서 그렇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감아버렸고, 그것이 자신들의 즐거움에 불쾌한 방해를 주지 않도록 그것을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 살아 있는 자들에게 더 큰 두려움을 주지 못하는 이유이니, 죽음이 먼 곳에 있고 확정되지 않은 거리에 있는 것으로 인지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만약 죽음의 정확한 시간이 알려진다면, 특히 그 시간이 가깝다면, 그것은 크게 놀라게 하고 공포에 질리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적 두려움의 본질이며, 우리 모두가 그 결과들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연의 불행입니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 안에 어느 정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보다 그것으로 인해 더 많이 고통받는 존재는 없으니, 이로 인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고문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 우리 위에 높은 분량으로 기세를 떨칠 때, 이보다 더 큰 고문은 없습니다. 참으로 모든 체질과 성품이 동일한 분량의 두려움을 허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태생적으로 용맹하고 굳건하여, 그 도량과 용기에 있어 사자와 같습니다. 다른 이들은 심히 겁이 많고 기가 죽어 있어서, 토끼나 사슴과 같아 작은 개 한 마리만 있어도 그들 백 명이 그 앞에서 도망칩니다. 루터(Luther)는 위험 속에서 큰 용기와 대담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던 반면, 멜란히톤(Melancthon)은 매우 겁이 많고 낙심하기 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의 차이점이 루터가 그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는 거의 안돈한 목격자로서 일들을 바라보고 있으며, 저 사납고 위협적인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말하는 그 어떤 것도 개의치 않노라. 나는 그대가 쓴 바와 같이, 그대를 거의 소진시키고 있는 저 불안한 염려들을 심히 싫어하노라."
은혜의 총량에 있어서는 한 사람이나 다른 사람이나 대등했을지 모르나, 멜란히톤의 은혜는 루터가 가졌던 것만큼 강건하고 용맹한 몸과 마음의 기질이라는 이점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연적 두려움에 대해서는 이쯤으로 간략히 해둡니다.
형식적으로나 본질적으로나 죄가 되는 두려움이 있으니, 이는 우리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허물이며, 우리의 단순한 고통과 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큰 악이자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만류하고 있는 두려움, 곧 '그들의 두려움'이라 불리는 것이니, 즉 위험이 위협할 때 육신에 속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죄성(sinfulness)은 다음의 다섯 가지 사항에 있습니다.
1. 그 두려움의 근원과 원인에 있으니, 곧 불신앙(unbelief)과 하나님에 대한 합당치 못한 의심입니다. 이는 우리가 신성한 약속의 안전함을 감히 의지하지 못하고, 우리의 의무의 길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지 못할 때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저 백성의 실상이었으니, 이사야 30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아오는 자들이 빠르리니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할 것이라" 등등.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산헤립이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침공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이로 인해 그들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이 환난 중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입을 통해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확언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애굽의 날개나 그 어떤 다른 보호자 아래에서 너희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온갖 도모와 계획들로 너희 자신을 번잡하게 하지 말고, 침착하고 고요하며 평온한 마음의 기질로 믿음을 통해 나의 권능 위에 안식하고, 나의 약속들을 너희의 안전 보장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너희의 구원이 될 것이요 너희의 힘이 될 것이며, 세상의 군대나 요새나 그 어떤 피조물의 방벽보다 너희를 보존하는 데 훨씬 더 실효적일 것입니다. 단 한 번의 믿음의 행위가 바로왕과 그의 모든 군대가 해줄 수 있는 것보다 너희에게 더 나은 유익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르기를 "아니라" 하였으니,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을 감히 신뢰하지 못하겠노라, 이런 때에는 좋은 약속보다 좋은 말 한 마리가 우리에게 더 나은 유익을 줄 것이라" 한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늘보다 애굽이 더 나은 안전 보장처였습니다. 이것이 거대한 불신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이 환난 날에 이와 같이 하나님을 버리고 피조물에게 연착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심하여 두려움과 고통을 자아내는 이러한 기질의 흔적은 가장 선한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것은 제자들 자신에게도 있었으니, 마태복음 8장 26절에서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바다에서 폭풍이 그들에게 닥쳤고 위험이 그들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즉시 여러분은 그들 내부에서 폭풍이 일어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바람보다 더 사나웠으며, 바다보다 더 진정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두 그들의 불신앙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적을수록 그들의 두려움은 더 컸습니다. 만약 사람이 약속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만 있다면, 그가 믿을 수 있게 된 그 분량만큼 그는 자신을 안전하게 여길 것입니다. 일리리쿠스(Illyricus)는 그의 《증인들의 카탈로그》에서 루터보다 조금 앞서 살았던 경건하고 연로한 신학자인 안드레아스 프롤레스(Andreas Proles)에 관한 이 주목할 만한 구절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자신의 빛에 따라 많은 점을 건전하게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밀라노의 공의회에 소집되었고 그 후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교회를 새로운 축일로 무겁게 하려는 교황의 제안에 반대하다가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겨우 살아서 빠져나온 그는 활과 무기들을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타고 가던 중, 그는 이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며 칼과 활로 유지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토록 쇠약하고 늙은이가 무기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그는 자신의 무기들을 던져버리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대의와 여정을 하나님께 의탁하였으며, 칼이나 활보다 그분의 약속들을 더 신뢰하여 안전하게 집에 도착했고, 그 후 그의 침상에서 평안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2. 두려움의 죄성은 그것의 과도함과 무절제함에 있으니, 곧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보다 더 많이 두려워할 때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에 관해서는 철학자가 물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참되게 말할 수 있으니, 곧 "그 자체의 경계 내에 가두어 두기가 어렵다(difficile suis terminis continentur)"라는 점입니다. 모든 덤불이 곰으로 보이고, 아주 작은 어려움도 우리를 공포에 밀어 넣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그 원인이 가진 가치와 공과를 초과합니다.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피조물의 분량을 넘어서서 사랑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큰 죄이며, 마치 그들이 우리의 모든 세상적이고 영원한 위로의 주인인 것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을 대적하여 원수들이 동맹하고 결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본문은 말씀하기를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이사야 7:2)라고 했으니, 혹은 우리가 속담처럼 쓰듯이 사시나무 떨듯 했다는 것입니다. 바람 부는 날에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흔들리고 떠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광경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집은 부분적으로는 과거의 재난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러나 특히 현재와 미래의 위험 속에서 자신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불신앙 때문에 이와 같이 행했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피조물에 대한 사랑에서뿐만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두려움에 있어서도 마땅한 절제의 경계를 넘어버리는, 선한 사람들의 너무나 잦은 허물입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면, 비록 그가 많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고 과거의 경험들과 그와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들로부터 그 믿음을 강화할 수 있는 가장 달콤한 격려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에서가 가까이 왔을 때 그는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창 32:7)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롭게 나타나셔서 그를 호위할 천사들의 왕실 경호대, 곧 천사들의 두 진영이나 군대를 보내주신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습니다(1, 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가 그에게 접근하자마자 그는 두려워했고, 참으로 심히 두려워했으며, 이토록 격려가 되는 환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두렵고 답답해했습니다.
3. 우리의 두려움의 죄성은 그것들의 무절제함(inordinacy)에 있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충분히 악하지만, 그 피조물의 권세를 피조물의 권세 이상으로 확대하는 것, 곧 우리의 두려움에 의해 그 어떤 피조물의 권세를 높여서 그것이 우리 위에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진 것처럼, 혹은 우리의 위로 위에 군림하여 그것들이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것처럼 그것에게 우리 위의 우위를 넘겨주는 것은 피조물을 그 자신의 계급과 서열에서 빼내어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것이며, 그러므로 매우 죄성 어리고 악한 두려움입니다.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것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것처럼 신뢰하는 것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것이 우리를 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것처럼 두려워하는 것은 심히 죄가 되며 하나님을 크게 격노하시게 만듭니다. 이 무절제한 신뢰는 이사야 31장 1-3절에서 책망받고 정죄받았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고, 그들이 강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말과 마병을 신뢰했습니다. 즉, 그들의 소견에는 선지자가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나와 그들에게 위협했던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애굽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에 대한 이 죄성 어리고 무절제한 의존을 끊어버리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3절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자빠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말하자면, 한 피조물이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할 신뢰와 의존을 다른 피조물에게 주는 것은, 즉 사람을 마치 신들인 것처럼 바라보고 말들을 마치 영들인 것처럼 바라보는 것은 죄성 어리고 위험한 오류라는 뜻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가장 강한 자라 할지라도 오직 홉풀이나 포도나무나 담쟁이덩굴과 같을 뿐입니다. 만약 그것들이 장대나 벽이나 참나무를 감싸 안는다면 지탱될 수 있을 것이요, 여러분 또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들이 여러분과 애굽인들이 하는 것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뒤엉킨다면, 너희는 실패하여 다 함께 자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피조물이 이처럼 다른 피조물을 무절제하고 죄성 깊게 신뢰하고 의지하기 쉬운 것처럼, 피조물들이 서로를 무절제하게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 역시 그 두려워하는 피조물을 사람이라기보다 차라리 신인 것처럼, 육체라기보다 차라리 영인 것처럼 대하는 심각한 불경건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두려움은 피조물을 확대하고 높여서, 그것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방과 자리에 두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책망하셨던 죄였으니, 이사야 51장 12절, 13절에서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하물며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잡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두려움이 어떻게 사람을 높이고 하나님을 저하시키는지를 보십시오. 그것은 사람의 해악을 끼치는 권세를 너무나 많이 생각한 나머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권세는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잊어버립니다. 그리하여 풀처럼 멸망할 한낱 필멸의 구더기가,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놓으신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던 악이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말하자면, 너희를 영원히 만들거나 망하게 할 권세가 그의 손에 있는 것처럼, 혹은 너희가 영원히 구원을 받거나 파멸을 당하는 것이 그의 뜻과 즐거움의 발치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그가 아무리 많은 권세와 분노로 무장하고 있을지라도 결코 그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그가 너희의 영혼을 지옥에 던질 수 있는 것처럼 너희의 몸만 만질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공유 불가능한 권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4. 두려움의 죄성은 그것이 인간의 마음에 미치는 산란하게 하는 영향력(distracting influence)에 있으니, 이로 인해 인간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의무를 이행하기에 부적합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때로 인간을 커다란 분망함 속에 밀어 넣고 그들의 생각을 극심한 무질서 속에 빠뜨려서, 당장에는 그들의 은혜나 이성으로부터 그 어떤 조력이나 구제도 얻지 못하게 만듭니다. 비정상적인 두려움 아래에서는 은혜와 이성이 모두 마치 그 마땅한 한계 이상으로 감겨 멈춰버린 시계 바퀴처럼 가만히 서서 아무런 움직임도 갖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의 날에 여호사밧에게서 발견되었던 저 광대하고 일관된 마음과 정신을 가진 사람을 찾기란 드문 일입니다. 역대하 20장 2절, 3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전하여 이르되 큰 무리가 바다 저쪽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하니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찾고." 그는 낯을 향하여 찾았으니, 즉 그토록 큰 공포와 두려운 경보의 때에 기도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정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신의 견고함과 평정함을 찾기란 드문 일입니다. 유사한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공포 속에서 선지자가 유대인들의 상태를 묘사한 바와 같이 행합니다(이사야 22:2, 3).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고 원수가 성벽 아래에 이르렀을 때, 직전까지 즐거워하던 성읍, 혹은 어떤 이들이 읽듯 방탕했던 성읍은 이제 극심한 공포(panic fear)에 질려 소동과 투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숨기거나 애곡하기 위해, 혹은 외부의 두려운 원수를 바라보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다른 이들은 원수의 칼을 모면하려다가 도리어 그 전에 두려움으로 인해 죽게 되니, 비참함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인지가 다른 대적의 칼이 한 번 닿기도 전에 그들을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호와를 찾기 위해 자신들의 골방으로 달려 들어간 자들에 대해서는 읽지 못합니다. 성읍은 소동으로 가득 찼으나 기도로 가득 차지는 않았습니다. 아, 두려움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차라리 산들을 향해 부르짖게 만들었습니다(5절). 가장 선한 사람들조차 가장 고요한 평화의 때에 자신들의 생각이 방황하지 않도록 지키고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어렵거늘, 두려움의 분망함과 소동 속에서는 수천 배나 더 어려운 법입니다.
5. 두려움의 죄성은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죄성 어린 수단들을 사용하도록 배치하고 부추기며, 그들을 유혹의 손길과 권세 속에 던져버리는 힘에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늘" (잠 29:25). 즉 그 사람 앞에 올무를 배치하고 놓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물을 펼치고, 두려움은 마치 디딤돌(stalking-horse)처럼 사람들을 그 그물 안으로 똑바로 몰아넣습니다. 거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거짓말이라는 올무에 빠져들게 하여 종교에 큰 누를 끼치게 만든 것이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방인인 아비멜렉이 그 일로 인해 아브라함을 훈계하는 것을 보는 것은 다소 기이한 광경이었기 때문입니다(창 20:9). 그리고 이 동일한 악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꾸짖으시는 것을 이사야 57장 11절에서 보게 됩니다.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였느냐." 두려움으로 인해 야기되는 두 가지 종류의 거짓말이 있으니, 하나는 말에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행실에 있는 것입니다. 외식(hypocrisy)은 행해진 거짓말, 곧 실천적인 거짓말이며, 우리의 교회사에는 두려움으로 인한 타협과 변절의 슬픈 사례들이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사탄이 인간을 상대로 자신의 유혹을 승리하게 하고 성공하게 만드는 가장 큰 도구입니다.
거룩하고 칭찬받을 만한 두려움이 있으니, 이는 우리의 고문이 아니라 우리의 보화이며, 영혼의 주된 장식이자 그 아름다움과 완전함이요, 결코 불행이나 죄가 아닌 두려움이니, 곧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가득한 자녀다운 두려움(awful filial fear of God)입니다. 자연적 두려움은 영혼의 순수하고 단순한 격정이며, 죄성 어린 두려움은 영혼의 무질서하고 부패한 격정이지만, 이 두려움은 자연적 격정이 거룩하게 구별되어(sanctified) 그로 인해 영적인 은혜의 이름과 본질 안으로 변화되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두려움 역시 제 본문에 언급되어 있으며, 죄성 어린 두려움에 대적하는 해독제(antidote)로 처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술객들의 지팡이를 삼켜버린 것처럼 육신에 속한 두려움들을 삼켜버립니다.
주야로 사람의 두려움 속에 있는 것은 가장 가혹한 심판 중 하나이지만(신 28:65-67), 온종일 여호와의 두려움 속에 거하는 것은 가장 달콤한 자비 중 하나입니다(잠 23:17).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날을 단축시키지만(사 22:24),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우리의 날을 장구하게 합니다(잠 10: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나(잠 14:27),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해악과 비참함의 샘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악에서 떠나게 되나(잠 16:6), 사람을 두려워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악 속으로 달려 들어가게 됩니다(잠 29:25).
이 두려움은 하나님에 의해 영혼 속에 심겨진 은혜로운 습성(gracious habit) 또는 원리로서, 이로 인해 영혼은 하나님의 눈 아래 거룩한 두려움(holy awe)을 유지하게 되고, 그로부터 그분이 기뻐하시는 바를 이행하고 행하도록 부추김을 받으며, 그분이 금하시고 미워하시는 바는 무엇이든지 피하고 멀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의 여러 종류에 대하여 정리합니다.
Q1.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불신앙(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권능을 의심함)이 어떻게 구체적인 두려움의 감정으로 발현됩니까?
Q2. 이 세상의 안락, 재물, 혹은 자기 생명에 대한 '과도한 사랑'이 두려움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Q3. 과거의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이나 영적 무지가 우리 마음에 가져오는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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