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굿윈, 생각의 허망함 (The Vanity of Thoughts)
토마스 굿윈, 생각의 허망함 (The Vanity of Thoughts)
여러분의 생각의 허망함과 그로 인한 여러분의 상태를 발견했으니, 그것들로 인해 스스로를 낮추십시오(겸비하십시오). 나는 이것의 근거를, 아굴이 우리에게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에 대해서도 스스로 낮추라고 가르치는 잠언 30장 32절에 둡니다.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악한 생각을 품었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이제 예레미야 31장 19절에서 에브라임이 '볼기를 치는 것'이 회개와 수치와 슬픔을 나타내는 것처럼,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은 자신의 죄책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더 크고 깊은 겸비함을 나타냅니다. 로마서 3장 19절에 "모든 입을 막고"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할 말이 없는 것, 즉 생각은 자유롭다거나 생각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변명하거나 핑계 대지 않는 것, 오히려 에스겔 16장 63절 말씀처럼 "네가 기억하고 부끄러워하여...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는 것, 욥기 40장 4절 말씀처럼 "나는 비천하오니...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하며 다시는 대답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손으로 입을 막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를 낮추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들은 원죄가 낳은 첫 태생이요 장자이며, 그러므로 야곱이 맏아들 르우벤을 일컬어 불렀던 것처럼 원죄의 '기력(힘)'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또한 그것들은 형제격인 다른 모든 죄들의 부모이자 그 죄들을 낳은 자들입니다. 우리 마음과 삶의 모든 반역과 모반에 있어서 최초의 모의자요 설계자이며 아히도벨들입니다. 그것들은 모든 무절제한 정서들의 풀무이자 방화범이며, 우리의 모든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도모하는(생각을 짜내는) 뚜쟁이들입니다. 모든 선한 의무들을 방해하는 자들이며, 우리의 모든 기도를 가로막고 망치고 파리가 알을 까게 하여(오염시켜서) 하나님의 콧속에 악취가 나게 만듭니다.
만일 그것들의 흉악함이 여러분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 생각들의 수를 숙고해 보십시오. 생각들은 끊임없이 이러하며, 이는 우리의 죄를 모래보다 더 많게 만듭니다. 솔로몬의 마음의 생각이 모래와 같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단 1분도 빠짐없이, 모래시계에서 1분 동안 떨어지는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생각들이 우리에게서 지나갑니다. 따라서 개별적으로 볼 때 그것들이 여러분의 죄 중에서 가장 작고 사소한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 무수한 숫자가 그것들을 여러분의 다른 모든 죄보다 더 많고 더 무겁게 만듭니다. 모래알보다 더 작은 것은 없지만, 그것들이 무더기로 쌓이면 더 무거운 것도 없습니다. 욥기 6장 3절,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나의 슬픔이)".
그것들 자체로는 중대한 오염(죄)들과 비교할 때 한 닢의 동전에 불과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조폐국은 자나 깨나 결코 쉬지 않으므로, 그것들은 우리가 쌓아 올리고 있는 그 진노의 보화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십시오. 하나님은 그 모든 동전 한 닢까지 계산하실 것이며, 당신을 벌하실 때 단 하나의 허망한 생각도 깎아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이렇게 보신다는 사실은, 여전히 기록으로 남아 있는 창세기 6장에서 옛 세상을 향해 그분이 제기하신 기소장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이 옛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무거운 심판을 선고하셨을 때, 그들의 살인, 간음, 그리고 중대한 오염들을 주로 그 멸망의 원인으로 제기하셨습니까? 오히려 그들의 생각들이었습니다. 그 생각들이 너무나 많고 끊임없이 악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죄들보다 그분을 더 격노케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속으로 내려가 그것들을 잘 숙고하여, 당신을 낮추고 비천하게 만드십시오. 만일 방 하나에 그토록 많은 악의 보화가 쌓여 있는 것이 발견된다면, 솔로몬이 부른 '배의 깊은 곳(모든 방)' 전체에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당신을 낮추기 위해 그것들을 숙고하되, 그것들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낙심하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가졌던 반역의 생각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비의 생각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시편 40편 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 없나이다 (셀 수 없나이다)" (자비의 생각에 대해 말씀하심). 당신은 그분을 거스르는 반역의 생각을 어제서야 시작했을 뿐이지만, 그분의 자비의 생각은 '영원부터' 있었고 '영원까지' 이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5장 7절에서 우리의 생각을 언급하시면서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생각들의 수가 많다는 이 반론이 사람들을 낙심시켜 자비의 소망을 잃게 만들 수 있으므로, 그분은 의도적으로 "그가 널리(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악된 생각을 능가하는 자비의 생각을 그분이 가지고 계심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며"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영원히 우리의 생각들에 대해 양심을 지킵시다(양심적으로 주의를 기울입시다). 욥도 그렇게 했습니다. 욥기 31장 1절,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생각하랴)?" 솔로몬은 특별한 명령을 내립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잠 4:23).
첫째, 당신은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게' 해야 하며, '형제를 지켜야' 하고,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야' 하며 그 안에 있는 당신의 생각들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기초로서 다른 모든 계명에까지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살인을 금지하는 동일한 계명에서 악의적인 생각 또한 금지되며 나머지 계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생각을 지킴으로써 당신은 사실상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원죄가 모든 계명에서 금지된다고 일컬어지는 것처럼, 생각 역시 모든 계명에서 통제를 받습니다.
둘째,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생각과 정서는 샘물이고 말과 행동은 시냇물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그러하듯 우리의 정서도 그러합니다. 생각은 풀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러하고,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육체 안의 기운(생기)처럼 영혼 안에 있어서, 모든 것을 관통하여 흐르고, 모든 것을 움직이며, 모든 것을 행동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생각은 그분이 유일한 주님이심을 선포하시는 영토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것들을 아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그분의 가장 위대한 칭호 중 하나로 삼으십니다. 왕들은 여러분의 혀를 통제하고 손을 결박하며 행동을 다스리려 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생각을 다스리십니다. 주로 생각들을 통해 우리는 마음속으로 그분을 거룩하게 하며, 생각들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들에 대해 양심을 지키지 않겠습니까?
넷째, 은혜의 사역과 능력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고후 10:5) 하는 것 외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를 뛰어넘는 우리 신앙의 영광입니다. 이 신앙의 어려움과 엄격함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 이토록 힘든 과업으로 만듭니까? 바로 생각들을 관찰하고 통제 범위 안에 두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실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우리의 생각을 지키는 데 있지 않다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모든 신앙은 단지 '육체의 연단'에 불과합니다. 교황주의자(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중얼거리며 기도할 수 있고 위선자들도 입으로 말할 수 있지만, 참된 경건은 바로 이것(생각을 지키는 것)입니다.
다섯째,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들을 본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말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같은 이유로 우리는 마땅히 생각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각은 마음의 말일 뿐, 다만 다른 사람에게 들릴 수 있는 형태를 갖추지 못했을 뿐이며 혀가 그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뿐입니다. 말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에 대해서도 당신은 심문을 받아야 합니다 (히 4:12; 고전 4:5).
당신이 어떤 동반자를 사귀는지, 누구를 당신의 집에 묵게 하는지, 누구를 당신의 품에 안는지 조심한다면, 당신의 마음에 묵고 있는 당신의 생각들에 대해서는 훨씬 더 조심해야 합니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이 거하시도록 지으신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이 생각하는 것들이야말로 당신과 가장 가깝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말씀을 생각할 때, 그것이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잠 6:2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먹는 것에 따라 피가 만들어지므로 당신이 먹는 것을 조심한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도 조심하십시오. 툴리(키케로)가 부른 것처럼 생각은 '영혼의 양식(pabulum animæ)'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묵상하는 것에 대해 말하며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렘 15:16)라고 말합니다.
여섯째, 사물의 결과를 본다면; 심판 날의 그 위대한 심문의 주제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마음의 생각과 뜻입니다 (고전 4:5). 그리고 심판 날 이후에, 사람들의 생각은 그들에게 가장 혹독한 사형 집행인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당신을 채찍질하시는 밧줄이 무엇입니까? 바로 당신 자신의 생각들입니다. 당신의 모든 죄를 샅샅이 되짚어보게 하는 참소하는 생각들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비수(단검)와 같을 것입니다 (사 33:18). 위선자의 고통은 '두려운 일들을 묵상하는' 것, 즉 하나님의 진노와 성도들의 복됨과 자기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입니다.
질문 1: 잠언 30장 32절의 말씀처럼 "손으로 입을 막고" 우리의 수많은 허망한 생각들 앞에서 깊이 겸비해야(스스로를 낮추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생각의 무수한 죄악됨을 절감할 때, 이사야 55장 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우리에게 어떤 소망과 위로를 줍니까?
질문 2: 잠언 4장 23절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는 명령이 성화의 과정에서 가장 치열한 영적 전투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심판 날에 우리의 은밀한 생각까지 심문받게 된다는 사실(고전 4:5)은 나의 일상에 어떤 경각심을 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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