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 주권
저자 및 서명: 아브라함 카이퍼(Kuyper, Abraham, 1837-1920), 영역 주권(Souvereiniteit in eigen kring)
행사 및 일자: 1880년 10월 20일, 암스테르담 신교회 성가대석에서 행한 자유 대학교(Vrije Universiteit) 개교 연설
출판사: 암스테르담(Amsterdam), J. H. 크라윗(J. H. KRUYT), 1880년 출판
영역 주권
나아가 "고유 영역에서의 주권"은 우리의 과학적(학문적) 목적이 띠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점 역시 실천적으로 이해합니다. 추상적이고 학구적인 무미건조함이 아니라 원칙의 확고함, 통찰의 깊이, 판단의 명료함, 다시 말해 거룩해진 사고력이야말로, 압도적인 힘으로 우리 인간의 삶 안에서 자유를 제한하고 그 삶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것에 맞서는 저항력입니다.
모든 국가 권력에는 자유를 불신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양한 삶의 영역들은 국가의 영역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공간이 공간을 제한할 수 없듯이, 국가가 법으로 그 경계를 정해주지 않는 한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한 영역이 다른 영역을 제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는 모든 영역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 인간 삶 전체를 포괄적으로 둘러싸는 '영역 중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더 고귀한 의미에서(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영역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팔을 튼튼하게 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그렇게 튼튼해진 팔로 확장과 더 넓은 영토를 향한 각 영역의 모든 시도에 저항하고 그것을 무너뜨리려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시대도 다시 그렇습니다. 시대의 징조들에 주목해 보십시오. 심지어 몸젠(Mommsen)조차도 자신이 그려낸 대담한 카이사르의 이미지 아래에서, 한때 카이사르가 그었던 제국주의적 노선으로의 복귀를 우리 세기 정치가들의 지혜를 위한 지침으로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독일의 재상이 여러분에게는 자유를 사랑하는 인물로 보입니까? 스당(Sedan)에서 그 재상에 의해 그토록 말할 수 없이 깊이 굴욕을 당했던 그 사람(나폴레옹 3세)은 어떠했습니까? 자유를 사랑하는 인상이었습니까, 아니면 억압적인 인상이었습니까? 지금 프랑스의 수도에서 스당의 그 사람을 대신해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인민 호민관이 여러분에게 남긴 인상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는 도덕적 회복력의 위축으로 인해 자신들의 자유가 꺾이는 것을 허용한, 비겁하고 용기 없는 국가들을 위한 징계이자 치료제로서 그렇게 되어야만 했습니다. 국가는 어쨌든 지상에서 최고 권력자입니다. 국가 위에는 주권자에게 정의를 행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지상의 권력이 없으며, 따라서 비열한 지배욕 때문이든 공익을 위한 고귀한 염려 때문이든 간에 모든 국가는 널빤지가 수축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쇠띠를 단단히 조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 삶의 영역들이 자유 속에서 꽃을 피울지 아니면 국가의 강제 아래에서 신음할지는 삶의 영역들 자체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이 도덕적 탄력을 지니고 있다면 밀리지 않을 것이고 스스로 구부러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노예의 족쇄에 묶인 노예 근성은 불평할 권리조차 잃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아픔이 숨어 있습니다. 자유는 각 영역의 경계에서 국가 권력에 의해 위협받는 것 못지않게 각 영역의 내부에서 죄로 인해 최소한 그만큼 위협을 받습니다. 통나무 널빤지에 띠를 두르려면 널빤지 통에 불을 지피는데, 망치질보다 내부의 그 불이 그것을 더 수축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삶의 영역의 핵심에는 죄의 불꽃이 튀어 오르는 열정의 불길이 연기를 내며 타고 있으며, 그 불경한 불길과 불행한 화재는 도덕적 생명력을 훼손하고 각 영역의 팽창력을 약화시켜 결국 가장 단단한 널빤지조차 구부러지게 만듭니다. 따라서 자유에 대한 성공적인 공격에서 국가는 결코 공범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주범은 여전히 죄와 관능적 쾌락 속에서 자신의 도덕적 근육을 이완시키고 스스로 주도할 힘을 상실한 채 의무를 망각한 시민 자신입니다. 국가적 핵심이 건강하고 그 고유 영역들 속에서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가는 국민이 있다면, 어떤 국가도 그 국민이 도덕적 저항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법의 경계를 옮길 수 없습니다. 규율이 약해지고 사치가 스며들며 죄가 뻔뻔스러워진 후에야, 이론은 약화된 것을 굴복시킬 수 있었고 나폴레옹은 썩은 것을 짓밟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억압을 통해서라도 그 영혼 잃은 삶의 영역들에 하나님으로부터 튀어 오르는 회복력이 거듭 내려와 (최근 철학의 말처럼) '원자'에서 '역동성'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마지막 고유 영역마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내렸을 것이며, 우리에게 자유란 그 무덤 위에 새겨진 'Sic transit(이렇게 사라지다)'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고귀한 민족들에게 자유를 수호하도록 주신 방어 수단 중에는 학문(과학)도 있으며, 학문은 최전선에 서 있습니다. 성령의 대변자들 가운데 다소 사람(바울)은 학문적으로 훈련된 사람이었고, 루터가 종교개혁의 자유를 얻어낸 것은 명상하는 요한이나 실천적인 야고보가 아니라 바울의 영적 보화로부터였습니다. 저 역시 학문이 자유를 배신할 수 있고 또 여러 번 배신했다는 것을 알지만, 이는 학문의 거룩한 사명 때문이 아니라 그 사명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형태의 학문을 빛의 천사로서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광인, 백치, 주정뱅이에게서 인간의 존엄을 빼앗아가는 것은 다름 아닌 명료한 의식의 부재가 아니겠습니까?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해서도 명료한 의식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학문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에 대해, 우리 안에서 생각하신 것을 그분을 따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는 단 한 사람의 의식이 아니라 모든 세기를 아우르는 인류의 존재 의식이자 생명 의식입니다. 존재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그렇게 우리 의식에 반사된 것을 우리 이성 안에 요약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처분입니다. 지혜를 갖는 것은 우리 존재 안에 있는 신성한 특징입니다. 참으로 지혜와 학문의 힘은 너무나 커서 세상사의 흐름은 대개 실제 현실이 어떠한가에 따르지 않고 인간이 그 현실을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개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자가 있습니까? 그 개념들이 대중의 여론을 형성하고, 그 여론이 법의식을 형성하며, 그 의식에 따라 영적인 삶의 흐름이 녹기도 하고 굳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원칙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사람은 단순히 감정 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며, 상상력만으로는 아무것도 진전시킬 수 없고, 신앙 고백만으로도 절반밖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가 사상의 세계에서도 힘을 얻어 내면에서 자극했던 충동, 곧 "우리 안의 신(Deus in nobis)"을 자신이 인식한 것에서 자신이 아는 것으로 전환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대중에게 장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단, 그리고 저는 이 점을 굳게 고집합니다만, 그 학문 역시 "고유 영역에서 주권자"로 머물러야 하며 국가의 후견이나 교회의 감독 아래에서 그 본질이 타락해서는 안 됩니다. 학문 역시 진리가 주권자인 독자적인 삶의 영역을 형성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생명의 법칙을 침해하거나 위반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학문을 불명예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세 세계,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 우리 고유 존재의 세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이미지들이 반사되는 우리 안의 거울과 같습니다. 이제 이성이 요구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각 세계의 이미지들을 그 고유한 성질에 따라 반영하게 하는 것, 곧 관찰과 감각(αἴσθησις). 둘째, 반사된 것을 순수한 눈으로 포착하는 것, 곧 우리가 그것들을 이해할 때까지 그 이미지들을 바라보는 것(νόησις). 셋째, 그렇게 포착된 것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것, 곧 이 본 것을 그 연관성 속에서 필연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꿰뚫어 보는 것(γνῶσις)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우리 안의 반영(afspiegeling)입니다. 이는 지혜를 주는 학문이자 삶에서 나와 삶을 위한 학문이며,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끝맺는 학문입니다! 스피노자(Spinoza)는 이 고유 영역에서의 학문의 주권을 파악했으며, 따라서 우리의 찬탄은 도덕적 기준으로 겁쟁이 에라스무스를 낮게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스피노자의 성품을 높이 평가합니다. 기관, 곧 감각이 스피노자에게는 불순했으므로 그의 결론은 필연적으로 거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보고 인식한 대로 '고유 영역에서의 학문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에 쓰이기를 단호히 거부했다는 사실은 선량한 개혁주의자로서 비난할 바가 아니며, 오히려 스피노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면서도 원칙 없는 타협으로 유혹당했던 한 명 이상의 사람들의 망설이는 불안정함보다 그것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필사적으로 결코 그리스도의 교회가 학문에 그 우월성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고수해야 합니다. 교회가 학문으로부터 피해를 입을 아주 실질적인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교회 스스로 학문이 결코 노예가 되지 않고 자신이 속한 고유한 영역에서 주권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살아가도록 주장해야 합니다. 물론 이는 오만에 빠져 학문을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에 대한 참람된 주장으로 유도할 수 있는 악마적인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첫째, 바로 곁에 깊이 추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고서는 그처럼 높은 탑에 오를 수 없는 법입니다. 둘째, 조금 전 국가의 폭정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이 여기 학문의 폭정에도 적용됩니다. 즉 교회가 먼저 영적으로 침몰하지 않는 한 그것은 생겨날 수 없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깨어남으로써 교회는 자신을 징계하러 온 학문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연스레 올바른 경계 안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국가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똑같지는 않은 이유는, 학문 영역이 학교라는 눈에 띄는 유기체를 형성하자마자 국가가 그 법적 영역을 결정할 형성적 권력(ἐξούσια ἀρχιτεκτονική)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국가 권력도 경계를 넘어 학문의 영역에 침입하기 전에 그 발의 신발 끈을 경건히 풀고 그 영역에 어울리지 않는 주권을 벗어던져야 할 뿐입니다. 국가의 시녀로서의 학문은 기벨린파가 겔프파를 대적하기 위해 이용했던 것처럼, 프랑스의 관료제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남용했던 것처럼, 그리고 독일의 반동세력이 괴팅겐의 수모에서 기쁨을 찾으려 했던 것처럼 매춘부적 자기 비하이며 윤리적 영향력에 대한 모든 타당한 권리를 상실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권력 기관들처럼 국가가 조금 더 고귀한 성품의 영감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나라의 학문이 고개를 숙이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세다 하더라도, 학문이 대학 생활 안에서도 다시금 고유한 뿌리에 기인하여 고유의 삶으로 성장하며 국가의 후견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우리의 토양 위에서도 축복과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국민 가운데 이스라엘의 선지자 학교와 예루살렘의 호크마 학교가 한때 자유롭게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학교와 로마의 그 추종자들의 학교가 한때 자유롭게 활동했습니다. 초대 기독교 학자들의 학교도 그렇게 자유롭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볼로냐와 파리의 유서 깊은 대학들도 마찬가지로 자유로웠습니다. 국가의 틀을 형성한 뒤에 그 안에 학문을 쏟아부은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출현하여 그 삶 속에서 스스로 형태를 창조한 학문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자유화를 위해 대학이 함께 노동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자유로운 형태 안에서였으며, 지난 세기 말에 신식 대학이 기관으로서 국가에 고정되고 나서야 사람들은 이 자유로운 틀을 '국가 기관의 한 지부'로 탈바꿈시키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개인의 변덕이 아니라 사건들의 압박, 즉 국가들의 나약함 때문이었으며, 이제 갑자기 국가가 대학 세계에서 손을 떼라고 요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에 가까울 것입니다. 오늘날 대중은 학문에 대한 의식이 너무 부족하고, 세상의 부자들은 너그러움이 너무 부족하며, 학위를 지닌 계층은 이를 시도해 볼 만한 의지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당분간은 국가가 계속해서 지원해야 합니다. 단지 그 노력이 자유화의 방향으로만 나아가고 "고유 영역에서의 주권"이 다시 한번 학문의 이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학교가 더 나은 방향을 향해 이제 첫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비과학적인 일입니까? 공정성의 저울 위에는 국립대학에 짓누르는 수많은 반대들이 존재합니다. 돈은 주는 사람에게 권력을, 받는 사람을 지배할 권력을 만든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를 제외한) 예술은 금이 필요하므로 인민의 자유를 영구적으로 향상시키지 못했습니다. 단 한 번의 토르베케(Thorbecke), 스홀텐(Scholten), 혹은 옵조머(Opzoomer)의 임명이 국가의 돈을 통해 국가의 운명과 학문의 진행에 미친 영향을 누가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더 고차원적이고 가장 결정적인 학문을 위해 이처럼 영향력 있는 선택을 할 때 국가를 인도할 수 있는 영적 척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더욱이 유대인과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게 강제 명령으로 (사실상 개신교의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하는) 신학부를 유지하는 데 비용을 지불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법적 정의감에 만족스럽지 못한 무언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국가법이 고유한 재단을 설립할 권리를 인정하고, 방금 들으신 대로 이 나라의 주권자가 이러한 짐에 짓눌리지 않은 우리의 자유로운 기관을 법체계 안에 수용했다면, 국민 자신이 유지하는 이 대학교의 설립 안에 학문과 국민의 삶을 위한 아름다운 예언이 담겨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 30년 전만 해도 "야간학교"로 불렸던 사람들이 모여 이제 학문적인 목적을 위해 자신들의 역량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노동 현장인 쟁기와 제분기에서 달려와 설립될 대학교를 위해 돈을 모으려는 가장 존중받지 못하는 "사유하지 않는" 부류의 국민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학문을 국민에게 가져다주려고 위로부터의 발전을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학문이 번성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국민 단체 안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지 않습니까? 학문을 생명 유기체에 연결하는 문제에 대해 이보다 더 실용적인 해결책이 있습니까? 이 국민의 돈으로 생활하는 학자들 안에는 메마르고 추상적인 것에 대한 혐오감과 함께 국민과의 동반 성장이 생겨나야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베푸는 행위 자체가 이미 힘이 아니며, 돈을 포기하는 것은 도덕적 능력을 구성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이 귀중한 설립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주어지는 도덕적 자본의 가치를 누가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인물 됨됨이의 부족을 한탄하지만, 깨어 있는 시민들의 이토록 자유로운 주도권에 의하지 않고서 어떻게 더 훌륭한 인격체들이 형성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곳에서 세무 당국의 징수권과 출납관들의 순응 덕분에 대학의 톱니바퀴가 순조롭게 돌아가더라도 우리는 전혀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생존 투쟁(the struggle for life)이지만, 바로 그 투쟁 속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헌신의 힘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돈에는 계측할 수 있는 금속 가치보다 더 높은 또 다른 가치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흘러들어온 황금에는 기도와 사랑과 이마의 땀방울이 배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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