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칼빈의 견해
현대 칼빈 연구의 환원주의를 논박하고 근대 초기 원전 용어 대조를 통해 칼빈의 전통적 신론과 방법론을 정밀하게 규명한 리처드 멀러의 학술 명문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칼빈의 견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칼빈의 이해에는 상당히 상이한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벤저민 워필드의 긴 연구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한 해석은 칼빈이 대체로 전통적인 견해, 곧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님의 본질에 내재한다는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고도로 사변적인 논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반감을 지녔다고 본다.1 이 해석에 따르면 칼빈은 일관되게 성경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접근의 근거를 두었으며, 하나님을 아는 데 후험적 접근을 취하였다.2 워필드는 『기독교강요』에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없는 이유가 ‘[칼빈의] 교의적 입장의 어떤 특수성이나 심지어 그의 신학적 방법의 특수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장르의 문제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한다.3 또 다른 해석은 종종 『기독교강요』에만 상당히 제한적으로 주목하였다. 그리고 칼빈의 논증이 하나님의 본질의 영성, 무변성, 불가해성에 관한 매우 짧은 언급을 거쳐 성경에서 삼위일체 교리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근거로, 칼빈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대한 논의를 피하였다고 결론 내렸다.4
포리스트 버크너의 최근 논문은 이 두 번째 논증의 흐름을 따르면서, 칼빈의 교리를 다소간 전통적으로 읽는 해석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칼빈이 하나님의 속성을 virtutes라고 부르기를 선호한 것은, 버크너가 이를 ‘능력들’이라고 번역하는 데서 드러나듯,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긍정적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들’을 뜻한다는 것이다.5 그는 ‘칼빈이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단순한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전제에 이의를 제기하고, ‘칼빈은 하나님의 형이상학적·본질적 속성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분이신 참 하나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긍정적 지식에 관해 말한다’고 결론 내린다.6 버크너는 또한 워필드의 기본 논지를 매우 직접적으로 반박하면서 칼빈의 속성에 대한 접근이 매우 독특한 ‘비사변적 방법’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7
버크너의 논증은 두 가지 기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칼빈이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킬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virtutes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둘째, 번역에서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버크너의 분석에는 높이 평가할 만한 부분이 많다. 특히 하나님 교리와 관련된 본문을 칼빈이 해설할 때 나타나는 경건을 분석한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그의 논증에는 그가 제시한 결론을 무너뜨리는 여러 문제도 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논증들을 제대로 제시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칼빈이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기 위해 선호한 virtus라는 용어의 용법에 대한 특정한, 그리고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는 해석에 비판의 근거를 주로 두고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virtutes라고 부르지 않는 속성들을 칼빈이 언급한 사실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칼빈이 종종 상당히 길게 논평한 내용의 실제 성격을 대체로 도외시한다.
그러므로 첫째로, 버크너는 칼빈이 ‘속성들의 논리적 관계나 배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8 그러나 그가 비판하는 두 글 가운데 어느 것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두 글 모두 칼빈이 이러한 작업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9 마찬가지로 그는 칼빈의 주석들이 ‘하나님의 절대적 특성들에 관한 광범위한 사변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10 그가 비판하는 글들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의 근본적인 논점은 칼빈이 성경 본문에 대한 주해에서 이끌어 낸 관계적 속성들을 강조하였다는 데 있다. 이 역시 쟁점이 아니며, 실제로 그가 반대하는 글들이 강조한 사항이다. 버크너는 또한 칼빈의 주석에서 신학을 편집해 낸다면 잠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상당히 방대한 논의’를 포함하게 될 것이라는 진술에 이의를 제기하면서,11 칼빈의 주석과 강의는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방대한 논의를 포함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들에 관한 사변을 포함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반대하는 진술들은 이 두 주장 가운데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주석들이 속성들에 관한 방대한 논의를 담고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칼빈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성경적 논의를 위한 상당한 분량의 자료’를 제공한 주석들, 그리고 덧붙이자면 강의와 설교들에서 방대한 논의를 편집해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12
둘째로, 칼빈이 의도한 의미를 이해하는 문제가 있다. 버크너의 논증 상당 부분은 로마서 1:20에 대한 칼빈의 주해의 표준 번역이 virtutes를 ‘속성들’이라고 옮긴 데 문제가 있다는 그의 관찰에 근거한다. 근대 초기에 사용된 virtutes는 능력들, 힘들, 역량들(potencies), 탁월성들 또는 완전성들과 같은 용어로 번역할 수 있다. 칼빈의 여러 번역자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표준적인 표현인 ‘완전성들’을 선택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virtutes를 단순히 ‘속성들’이라고 옮겼다. 버크너는 virtutes를 다르게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배틀스와 마찬가지로 ‘능력들’을 적절한 번역으로 선택하였다.13 이러한 해석은 그로 하여금 최근의 연구가 한 가지 특정한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게 한다. 즉 최근의 연구는 앞에서 언급한 모든 한정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지녔다고 간주함으로써, 칼빈의 ‘비사변적 방법’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에 따르면 ‘능력들’은 ‘형이상학적·본질적 속성들’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긍정적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들’ 또는 ‘하나님의 관계적·인격적(personal) 속성들’로 이해해야 한다.14 버크너가 virtutes를 ‘능력들’이라고 옮긴 것은 칼빈의 용어에 대한 옹호 가능한 번역이지만, 그가 더 나아가 능력들을 해석한 방식은 상당히 오도하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버크너의 해석이 미흡하다는 점을 보이고자 한다. 또한 칼빈의 virtutes 용법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본질적 특성들, 따라서 형이상학적 특성들로 읽는 전통적인 해석의 범위 안에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후험적 방식으로 논증되며, 절대적 속성과 관계적 속성, 또는 일차적 속성과 지성 및 의지의 작용에 관한 속성이라는 표준 범주들과는 다소 불명확한 관계에 놓인다.
칼빈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해 쓸 때 가장 자주 그것들을 virtutes(덕능)라고 지칭하였지만,15 때로는 propria(특성들)16와 epitheta(수식어들)라는 말도 사용하였다.17 마찬가지로 프랑스어에서는 vertus, tiltrez, qualitez, proprietez라는 용어들을 사용하였으며, 그 가운데 vertus가 가장 빈번하였다. 칼빈은 또한 하나님의 성질을 술어로 서술하는 것과 관련하여 ‘돌리다’ 또는 ‘귀속시키다’라는 뜻의 동사 attribute를 사용하였다. 프랑스어로 된 신명기 설교에서 그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넘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묻고 ‘우리는 그분께 그분의 성질들을 돌린다[luy attribuer ses qualitez]’고 말한다. 여기서 그 성질들은 그분이 ‘능하시고 두려우신 분’이라는 것이다.18 마찬가지로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전능하신’이라는 ‘칭호’를 ‘돌려야’ 한다고 설명한다.19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을 다루는 장들의 첫머리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무변하고 영적인 본질[immensa et spirituali Dei essentia]에 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어리석은 관념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세속 철학의 교묘한 논변들을 논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20 같은 절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자신의 짧은 목록에 불가해성과 단일성을 덧붙인다. 로마서 1:21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영원성, 능력, 지혜, 선하심, 진리, 의, 긍휼을 열거하며, 조금 뒤에는 불변성과 영광을 추가한다.21 다른 곳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생명, 지혜, 능력 … 의, 선하심, 긍휼’을 언급하고,22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 … 그분의 virtutes … 자비, 선하심, 긍휼, 공의, 심판, 진리’에 대해 설명하며,23 창조 세계에서 관조해야 할 ‘지혜, 공의, 선하심, 능력의 헤아릴 수 없음’에 관해 쓴다.24 또 하나님을 ‘모든 장소를 초월하시며 … 부패나 변화를 초월하여 높이 계시고 … 무한한 크기 또는 높음을 지니시며, 불가해한 본질, 저항할 수 없는 능력, 영원한 불멸성을 지니신’ 분으로 묘사하고,25 ‘영광 … 거룩함 … [그리고] 그분의 virtutes, 능력, 선하심, 지혜, 의, 긍휼, 진리’를 지니신 분으로 묘사한다.26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영원하고 영적이며 무한하고 불가해하며 단순하신 분이고, 능력(vertu), 지혜, 헤아릴 수 없는 선하심을 지니시며, 자신의 뜻으로 다스리신다고 말한다.27 칼빈은 또한 하나님의 무정념성(impassibility)을 전제했다.28
여기서 주목할 점은, 버크너의 해석과 달리 칼빈이 하나님의 본질의 불가해성을 빈번하게 언급하는 것이 단순히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것에 관하여 사변해서는 안 된다는 뜻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언급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온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 가운데 하나, 곧 불가해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나님의 본질을 불가해하다고 규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전적으로 인식 불가능하다거나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을 완전히 또는 적절하게 파악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는 칼빈에게 교리적으로나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29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예를 들어 하나님의 위엄,30 선하심,31 능력,32 영광33을 불가해하면서도 성경에 계시된 것으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 이 역시 버크너의 논제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으로서 불가해성에 대한 칼빈의 관심은 매우 깊은 실천적·목회적 적용을 지닌다. 아울러 이 속성은 대외적(ad extra) 작용을 갖지 않으며, ‘능력(power)’이나 ‘행위(act)’로 기술할 수도 없다.34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각각의 속성 목록(1.5.10, 1.10.2, 1.14.21, 3.20.40, 3.20.41)에서, 그리고 로마서 1:21 주석에서 칼빈이 제시하는 목록에 앞서 나오는 1:20 주석에서도, virtutes와 virtus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포드 루이스 배틀스는 이를 모든 경우에 ‘능력(power)’ 또는 ‘능력들(powers)’로 옮긴다. 그는 virtutes가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지적하며,35 중세 신학과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모두 속성에 관한 해설을 제시하지만 칼빈의 『기독교강요』에는 그러한 해설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virtutes가 하나님의 관계성을 수반하는 속성들을 분명히 가리키는 대목들이 있다. 다음 진술이 그 예인데, 여기서는 영원성과 자존성이 먼저 제시되고 virtutes가 그 뒤를 따른다.
우리는 [먼저] 그 장엄한 이름의 반복에서 그의 영원성과 자존성에 대한 확언을 볼 수 있다. 그다음에는 그의 덕능(virtutes)에 대한 찬양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자신이 그 자체로 어떠한 분이신지가 아니라 우리에게 어떠한 분이신지를 나타내신다. 이는 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헛되고 공허한 사변보다는 생생한 지각에 있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말했듯이 하늘과 땅 모두에 드러나는 바로 그 덕능(virtutes), 곧 자비, 선하심, 긍휼, 공의, 심판, 진실하심이 열거된 것을 발견한다. virtus와 potentia는 엘로힘이라는 이름 아래 포함되기 때문이다.36
1560년 프랑스어 번역은 virtutes가 언급된 두 곳을 모두 vertus로 옮기지만, virtus et potentia에 대한 언급은 puissance로 압축한다.37 칼빈은 이어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설명할 때 바로 그 칭호들(라틴어 epitheta, 프랑스어 tiltres)로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여러 구절을 열거하는 대신, ‘지금은 하나의 시편으로 만족하자. 그것은 그의 덕능(virtutes)을 정확하게 요약하여 아무것도 빠진 것이 없어 보이게 한다’고 말한다. 더구나 이러한 모든 virtutes 또는 epitheta는 ‘피조물 가운데서 고찰할’ 수 있다.38
이 대목에 관하여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칼빈은 virtutes를 epitheta와, vertus를 tiltres와 동의어로 사용한다. 이 용법은 virtutes를 ‘행위들(acts)’과 동일시하는 해석에서 벗어나게 한다. 또한 하나님의 모든 virtutes를 피조물 가운데서 고찰해야 한다는 언급은 분명히 하나님의 본질이 그 자체로 무엇인가에 대한 선험적(a priori) 이성적 사변을 배척하지만, virtutes나 epitheta를 본질적 속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실제로 칼빈의 표현은 창조된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앞선 진술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곳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욱이 그 역량들[potencies; virtutes]은 아주 명백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역량들의 가장 중요한 의미와 쓰임,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고찰하는 목적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 안으로 내려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 안에 자신의 생명과 지혜와 virtus를 드러내시고[exserat], 우리를 향하여 자신의 의와 선하심과 긍휼을 행사하시는지[excerceat] 살펴볼 때이다.39
여기서 열거된 속성들, 곧 생명, 지혜, virtus, 의, 선하심, 긍휼은 모두 virtutes로 지칭된다. 그러나 앞의 세 가지는 드러나며, 뒤의 세 가지만 행사된다.40 버크너의 해석에 반대되는 특히 결정적인 사실은 능력(power) 또는 역량(potency)을 뜻하는 virtus가 생명 및 지혜와 함께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virtutes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속성의 발견은 분명히 그 속성의 현현을 통해 이루어지는 후험적(a posteriori) 발견이다. 따라서 다시 말하자면 칼빈의 관심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 관한 사변적 작업에 있지 않다. 그러나 virtutes는 단순히 대외적(ad extra) 행위나 행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신성(divinitas)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지표이다.
더 나아가, 이 특정 대목의 의미와 번역을 생각하면, 칼빈이 일련의 하나님의 속성을 ‘능력들(powers)’이라고 지칭하고 나서 그 가운데 한 속성을 ‘능력(power)’이라고 지칭한다는 것은 이상한 중복이 될 것이다. 같은 문제는 말라기 강해에서도 나타난다. 칼빈은 ‘우리 눈앞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능력(power), 공의, 그리고 그 밖의 덕들(virtues)’을 언급하는데, 여기서 ‘능력(power)’은 potentia를, ‘덕들(virtues)’은 virtutes를 옮긴 것이다. 이 구절을 ‘능력(power), 공의, 그리고 그 밖의 능력들(powers)’로 옮기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41 비슷한 문제는 『기독교강요』 1.10.2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덕능(virtutes)에 대한 찬양 … 바로 그 덕능(virtutes), 곧 … 자비, 선하심, 긍휼, 공의, 심판, 진실하심이 열거된 것. virtus와 potentia는 엘로힘이라는 이름 아래 포함되기 때문이다.42
배틀스는 여기서 특별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고, virtus가 언급된 세 곳을 모두 ‘능력(power)’으로 옮겼다. 마지막 대목에서는 potentia가 일반적으로 ‘능력(power)’으로 번역됨에도 불구하고 단어의 순서를 뒤바꾸어 virtus et potentia를 ‘능력과 힘(power and might)’으로 옮겼다. 다른 세 번역자는 그 어려움을 알아보았다. 노턴은 virtutes가 언급된 두 곳을 ‘덕들(vertues)’로 옮긴 다음, virtus et potentia를 ‘힘과 능력(might and power)’으로 옮겼다. 앨런은 virtutes가 처음 사용된 곳을 ‘속성들(attributes)’로, 두 번째 사용된 곳을 ‘완전성들(perfections)’로 옮겼다. 그리고 virtus et potentia는 단순히 ‘능력(power)’이라고 하여 둘의 대비를 없앴는데, 아마 칼빈의 1560년 프랑스어 본문을 참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베버리지는 virtutes가 처음 두 번 사용된 곳을 ‘완전성들(perfections)’로 옮기고, virtus et potentia는 ‘능력과 활력(power and energy)’으로 옮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강요』 3.20.41에서 칼빈이 ‘하나님의 영광 …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함 … [그리고] 그의 덕능(virtutes), 능력, 선하심, 지혜, 의, 긍휼, 진실하심’을 언급하는 곳에서,43 virtutes를 ‘능력들(powers)’로 번역하고 이어서 potentia를 ‘능력(power)’으로 옮기는 것은 상당히 오해를 일으킬 것이다. 그 이유는 단지 영어에서 중복이 생기기 때문만이 아니다. 더 주된 이유는 칼빈이 이 모든 술어적 진술을 하나님의 본질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노턴은 virtutes를 ‘힘(strength)’으로, potentia를 ‘능력(power)’으로 옮겼다. 앨런과 베버리지는 virtus의 번역어로 ‘완전성들(perfections)’을 택했고, potentia는 역시 ‘능력(power)’으로 옮겼다. 배틀스는 자신의 규칙에서 벗어나 virtutes를 ‘힘(might)’으로, potentia를 ‘능력(power)’으로 옮긴다.
virtutes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칼빈의 로마서 1:20 주석에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이 지점에 이르면 신성이 우리에게 알려진다. 이 신성은 하나님의 모든 덕능(virtutes)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그것들이 모두 그 아래[곧 신성 아래] 포함되기 때문이다.’44 이 대목의 16세기 번역자들은 virtutes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 옮겼다. 프랑스어에서는 ‘vertus’로,45 영어에서는 ‘vertues’로 옮겼다.46 칼빈의 19세기 번역자들은 virtutes를 ‘속성들(attributes)’로 옮겼다.47
T. H. L. 파커는 칼빈의 virtutes 용법에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칼빈이 그 단어를 프랑스어로 어떻게 번역했는지 분석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칼빈은 흔히 proprietez로 옮겼지만 oeuvres와 연결하기도 했다. 따라서 칼빈이 『기독교강요』 1.10.2의 속성에 관한 논평에서 시편 145편으로부터 언급하는 하나님의 virtutes는 그의 프랑스어판에서 proprietez로 지칭된다.48 『기독교강요』 1.5.9에서 virtutes는 초기 프랑스어 판본들에서는 oeuvres로, 1560년판에서는 vertus로 옮겨진다.49 파커는 이 용법이 ‘하나님의 본성에 속하는 속성을 인류를 향하여 행사하는 것’을 뜻한다고 결론지었다.50
virtutes를 거의 일관되게 ‘능력들(powers)’로 번역하기로 결정한 데 더하여, 배틀스는 몇몇 대목에서 칼빈이 virtus Dei를 potentia Dei의 동의어로 사용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51 그러나 그는 이 용법이 제기하는 어휘상의 문제들을 검토하는 대신, 칼빈이 이 용어를 선호한 이유에 관하여 다소 공상적인 설명을 제시했다. 그는 그 선호가 『기독교강요』 1.14.5에서 천사들을 하나님의 virtutes로 간접적으로 지칭한 데서 생겨났으며, ‘칭찬할 만한 인간의 자질들’을 지칭하는 라틴어 신약성경의 용례들과 결합되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모든 측면’을 기술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배틀스의 주장에 따르면 virtus Dei는 ‘성령의 역사’이기도 하다.52 배틀스는 virtutes가 ‘그 완성이 그리스도 자신 안에 있는 역동적이고 인격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반영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용어라고 결론짓는다.53
근대 초기의 사전들을 검토하면 칼빈의 의미를 설명할 더 견고한 근거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앞서 나온 모든 번역도 설명할 수 있다. 프랜시스 굴드먼이 제시한 potentia의 정의를 살펴보면 ‘힘(might), 강력함(puissance), 힘(force), 능력(ability), 능력(power), 지배력(sway)’, ‘권위(authority)’뿐 아니라, ‘행하거나 작용을 받을 수 있는 능력(power to do or suffer)’으로 이해되는 ‘가능성(possibility)’, 그리고 ‘능력(ability)’도 발견된다.54 의미의 중첩은 virtus의 정의에서도 나타난다. 곧 ‘덕(vertue), 힘(strength), 신속함(swiftness), 강력함(puissance), 남성다움(manliness), 능력(power), 도움(help), 완전성(perfection), 공로(merit), 응분의 가치(desert), 권위(authority)’이다.55 ‘덕(vertue)’ 항목에서는 ‘virtus, probitas, praestantia, rectum’을 발견하며, ‘덕 또는 힘(vertue or strength)’은 facultas, efficacitas, natura로 정의된다.56 예컨대 라이더는 ‘능력 또는 힘(ability or force)’이라는 뜻으로 이해된 ‘능력(power)’의 라틴어 대응어로 첫 번째 묶음에서 potestas, potentia, pollentia, valentia, factio, opes를 제시하고, 두 번째 묶음에서는 다른 가능한 단어들과 함께 vis, vires, virtus, copia, connatus를 제시한다. ‘행하거나 말할 수 있는 능력(Power to do or speak)’ 항목에서는 facultas와 habentia를 제시한다.57 프랑스어 propriété와 vertu에 대응하는 영어 표현을 검토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Vertu는 ‘덕(vertue), 선함(goodnesse), 정직함(honestie), 진실함(sinceretie), 온전함(integritie); 가치(worth), 완전성(perfection), 응분의 가치(desert), 공로(merit); 또한 용맹(valour), 무용(prowesse), 남자다움(manhood); 또한 활력(energie), 효력(efficacie), 힘(force), 능력(power), 힘(might); 또한 훌륭한 자질 또는 특성(a good part or propertie), 칭찬할 만한 성질(a commendable qualitie)’로 옮길 수 있다.58 Propriété는 ‘특성(propertie), 고유성(proprietie); … 또한 어떤 것의 본성(nature), 성질(qualitie), 성향(inclination) 또는 기질(disposition)’로 정의된다.59 여러 번역자가 virtutes를 옮기는 데 사용한 용어 중 사전에서 발견되지 않는 유일한 것은 ‘속성(attribute)’이다. 그러나 이에 상응하는 ‘완전성(perfection)’과 ‘특성(property)’은 일관되게 확인된다.
이러한 정의들은 virtus의 여러 의미를 어느 정도 밝혀 주며, 노턴이 이 용어를 ‘덕(vertue)’ 또는 ‘능력(power)’으로 번역한 이유도 설명해 준다. 영적 존재의 경우 virtus는 능력을 뜻할 수 있는데, 능력은 그러한 존재가 지닐 수 있는 ‘특성(propertie)’ 또는 ‘칭찬할 만한 성질(commendable qualitie)’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또한 이 용어는 특성들, 완전성들, 능력들(abilities), 기능들(faculties), 또는 습성들(habits)로 이해되는 영혼의 다양한 virtutes animae, 즉 ‘능력들(powers)’ 가운데 어느 것이든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로 사용될 수 있다. 노턴은 복수형 virtutes가 여러 특성을 가리킬 때에는 보통 ‘덕들(vertues)’로 옮기고, 단수형이 다른 특성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특성을 가리킬 때에는 ‘능력(power)’으로 옮긴다. 이로부터 노턴은 복수형을 ‘능력들(powers)’로 옮기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적어도 그것이 단수형 ‘능력(power)’과 대비될 때에는 그랬으며, 아마 하나님의 속성 일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될 때에도 그랬을 것이다.60
virtus의 용례를 신학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의미 범위로 좁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당시의 신학 또는 철학 전문 사전들에 제시된 정의를 살펴보는 것이다. 알텐슈타이크의 『Lexicon』에 따르면, 성경에서 사용되는 virtus는 ‘신체적 힘(corporeal strength)’이나 ‘외적 행위 또는 작용(exterior act or operation)’을 가리킬 수 있지만, ‘내재하는 작용 원리(an inherent principle of operation)’를 뜻할 수도 있으며, 도덕적 덕으로 이해될 때에는 습성(habitus)으로 존재하는 ‘영혼 안의 어떤 것(something in the soul)’을 전제한다.61 알텐슈타이크는 또한 지성적 덕능(virtutes)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다섯 가지 인식 방식, 곧 지혜, 지성, 지식, 실천적 지혜, 기술로 규정한다.62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 지성적 덕과 도덕적 덕은 습성 또는 성향(habitus)으로 이해되었고, 따라서 ‘영혼의 능력들(powers of the soul)’, 곧 virtutes animae 또는 potentiae animae로 이해되었다.63 그러나 이런 의미의 능력은 외적으로 수행되는 행위가 아니라 영혼 안에 자리 잡은 역량(potency)이다.64 virtus의 이러한 의미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여러 사전에 나타나며, 마티아스 마르티니우스의 방대한 저작에는 상당히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는 virtus의 여러 정의 가운데 하나로 인간 안에 있는 ‘완전성(perfection)’ 또는 ‘능력(capacity)[habitus]’, 곧 인간이 잘 행위하거나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제시했다. 나아가 그는 virtus가 도덕적 완전성, 영혼의 힘이나 용기를 가리킬 수 있으며, 하나님의 경우에는 ‘신적 완전성(divine perfection)’을 가리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복수형 virtutes는 영혼의 특성들이나 역량들(potencies)을 가리켰다. virtutes animae는 potentiae animae의 동의어로 기능하면서 지성, 지식, 지혜, 공의, 용기, 대범함, 진실성 등의 능력 또는 습성(habitus)을 가리켰다. 마르티니우스의 사전이 이 용어를 정의한 바에 따르면, virtus란 사람이 활동하거나 행위할 수 있게 하는 완전성 또는 능력(habitus)이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행위나 활동 자체가 아니라 행위하거나 활동할 수 있는 내재적 능력이다.65 Potentia도 상당히 유사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곧 행위할 수 있는 능력(habitus), 힘(vis) 또는 기능을 뜻할 수 있었다.66 물론 칼빈은 당시 일반적으로 수용되던 능력심리학(faculty psychology)을 따랐으며,67 배틀스가 지적한 것처럼 virtutes와 potentiae를 동의어로 사용했다. 하나님에 관한 논의에서 영혼, 영혼의 생명, 지성과 의지라는 영혼의 능력들 사이에 상당히 전형적인 유비가 설정되었다는 점과, 영혼의 덕능(virtutes animae)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들 사이의 상응 관계를 고려하면, 칼빈이 유비적으로 적합한 지칭어로서 virtutes라는 용어를 선호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68
그러나 이 용례는 명백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문제를 수반했다. 아퀴나스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안에 덕들이 있다고 상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은 모든 덕능(virtutes)을 어떤 방식으로 자기 안에 포괄해야 하지만,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 안에 있는 것처럼 습성으로 술어화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덧붙여진 어떤 것으로 인해 선하시다고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단순한 자신의 본질로 인해 선하시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덕은 하나님 안에서 습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로 존재한다’고 답했다.69 또한 그는 ‘습성은 가능태와 현실태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불완전한 현실태이다. 그래서 습성을 지닌 사람들은 잠든 사람들에 비유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현실태가 가장 완전하다. 따라서 하나님 안의 현실태는 습성이나 지식과 같은 것이 아니라 관조와 같은 것이며, 관조는 궁극적이고 완전한 현실태이다’라고 말했다.70 요컨대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단순하시므로, 그리고 이 점에 칼빈도 틀림없이 동의했으므로, 덕능(virtutes)은 하나님을 술어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이 용어는 하나님께 본질적으로 속하면서도 인간 안에 나타나는 선의 구체적 사례들과 유비적으로 상응하는 특성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덕능(virtutes)은 관계적 하나님의 속성들, 또는 하나님의 대외적 작용에 관한 속성들이다.
『기독교강요』에는 칼빈이 관계적 또는 작용적 속성들로 이해되는 덕능(virtutes)과 일차적 현실태의 절대적 속성들을 구별하는 듯한 대목이 두 곳 있다. 『기독교강요』 1.10.2에서 그는 영원성과 자존성을 언급한 뒤 자비, 선하심, 긍휼, 공의, 심판, 진실성을 virtutes로 규정한다. 『기독교강요』 3.20.41에서는 먼저 영광과 거룩함을 언급한 뒤 능력, 선하심, 지혜, 의, 긍휼, 진실성을 virtutes로 규정한다. 두 대목 모두 칼빈의 용례가 영혼의 덕능(virtutes animae)에 관한 통상적 개념을 유비적으로 활용한다는 논제를 뒷받침한다. 반면 『기독교강요』 1.5.10에서는 ‘생명, 지혜, 능력(virtus) … 의, 선하심, 긍휼’을 virtutes로 규정하는 듯하다. 지혜, 의, 선하심, 긍휼은 통상 영혼의 덕능(virtutes animae)으로 간주되지만, 생명과 아마도 능력은 그렇게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사야 41:1 주석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능력, 선하심, 지혜, 그 밖의 그분의 덕능(virtutes)’을 언급한다.71 로마서 1:21에 제시된 목록은 영원성을 포함하므로 또 다른 예외를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칼빈이 이어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virtutes라고 지칭함으로써 암묵적으로 영원성(aeternitas)을 하나님의 덕능(virtus)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72 virtutes로 규정된 속성들 대부분이 통상 영혼의 덕능(virtutes animae)으로 규정되는 능력들에 상응한다는 사실은, 칼빈이 하나님을 유비적으로 지성과 의지의 능력을 지닌 존재로 묘사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당시 능력심리학의 언어에서 이 용례를 취했다는 가설을 확인해 준다.
칼빈이 이러한 용례를 채택했을 법한 이유를 파악했다면, 영원성, 불변성, 자존성, 무정념성, 무한성, 무변성, 위대함, 지고함, 불가해성, 불멸성, 생명, 영광, 거룩함은 영혼의 덕능(virtutes animae)이 아니라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그런데 칼빈의 주석, 강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할 때 이 속성들이 실제로 언급된다. 칼빈은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자신의 언급을 관계적 또는 작용적 속성들로 한정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또한 때때로 능력들이나 역량들로 정의되지 않았을 속성들, 곧 생명,73 영원성,74 영광,75 그리고 아마도 위대함을 virtutes로 규정했다.76 그는 디모데전서 1:17 주석에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지칭하기 위해 epitheta라는 용어도 사용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보이지 않으시며 홀로 지혜로우신 분으로 규정된다. 칼빈이 자신의 용어를 엄밀하고 일관되게 적용했더라면, 이 중 지혜는 보통 virtutes 가운데 하나로 규정되었을 것이다.77
하나님의 속성들과 관련하여 칼빈이 자주 반복하는 진술 가운데 하나는, 성경이 ‘오직 하나님의 본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의 논점은 분명히 하나님의 본질을 언급하기를 삼가고 하나님의 대외적(ad extra) 사역들만을 지칭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칼빈의 논점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여러 속성들, 곧 덕능(virtutes)이 작용적이기도 하며, 작용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예배와 순종 등의 맥락에서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칼빈이 이사야 41:4 주석에서 주장하듯이,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본질만도 아니고 오직 대외적(ad extra) 작용이나 관계성만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어떠한 분이신가는 하나님과 창조 세계 및 피조물들의 관계의 토대이기도 하다.78 칼빈이 이사야 46:4 주석에서 명시적으로 진술하듯이, 하나님은 ‘그 본질에서뿐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언제나 동일하시다.79 이사야 45:18에 대한 그의 주석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이 자신이 하나님임을 거듭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자신의 본질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우상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것이다. … 또한 이 말씀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께만 속하는 모든 사역을 다루며, 그 사역의 어느 부분도 피조물들에게 넘겨지지 않도록 한다.’80 따라서 칼빈은 분명히 하나님의 관계적 속성들과 절대적 속성들, 공유적 속성들과 비공유적 속성들 모두에 관해 서술한다.
버크너는 사변이라는 개념에 관한 칼빈의 매우 부정적인 용례를 아퀴나스의 긍정적인 용례와 대비시켜 칼빈의 가르침과 전통적 속성론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 그러나 버크너가 아퀴나스의 ‘사변적 지식’에 대한 이해를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며 지복직관이라는 인간의 목적을 향해 인류를 이끄는 데 도움을 주는’ 지식으로 올바르게 정의한 뒤, 칼빈이 보는 사변을 ‘성경과 사역 안에서 하나님이 은혜롭게 자신을 증언하시는 것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불가해한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시도로 설명한다면, 이러한 대비의 시도는 상당히 미흡해진다.81 아퀴나스와 칼빈은 이 용어를 전혀 다르게 사용했을 뿐 아니라, 계시에 근거하고 인류를 인도하는 것으로 사변적 지식을 이해한 아퀴나스의 견해는 성경의 계시와 신학적 과제에 관한 칼빈의 이해와 상당한 친연성을 지녔음이 명백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슈타우퍼가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덕능(vertus)과 특성들(propriétés)에 대한 칼빈의 접근은 표현 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퀴나스의 접근을 ‘반영’했다. 아퀴나스는 이생에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본질을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은 그분의 결과들을 통해 알려진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82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스콜라적 논의의 교묘함을 비난하지만,83 자신의 주석에서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상당히 많은 논의를 제시한다. 거룩한 이름 ‘여호와(Jehovah)’가 ‘하나님의 영원성과 근원적 본질’84 또는 그와 유사하게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과 위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85 칼빈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관련하여 본질이 하나이며 단순하다는 점을 자주 언급한다. 예를 들어 에스겔 주석에서 칼빈은 여호와를 논의하는 긴 대목에서 당시의 반삼위일체론자들을 공격한다. 그는 ‘하나님’이 언급될 때에는 삼위일체를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하나님만을 언급하는 곳에서는 본질 전체가 이해되기’ 때문이다.86 따라서 바울이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셨다’고 진술할 때(딤전 3:16),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며 ‘그러므로 신성 전체가 육신으로 나타났다’고 추론해야 한다.87 더 나아가 다음 구절에서도 그는 ‘본질을 나누는 것은 불경건한 일이지만, 위격들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88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에 관한 이와 유사한 긴 논의는 요한복음 1:1–5를 다룬 칼빈의 『Congrégation』에도 나타난다. 칼빈은 ‘말씀’이 인간의 정신 안에 ‘숙고(counsel)’가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스콜라적 격언을 되풀이하자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비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89 칼빈은 이어서 복음서가 하나님과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 사이에 ‘구별’을 설정할 때, 그것은 ‘결코 본질의 구별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하나님] 안에는 하나의 단순한 본질만이 있기’ 때문이다.90 다음으로 칼빈은 교리적 용어 ‘위격들’을 검토한다. 그는 이 용어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있는 것과 같은 특성들’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고 말한다.91 이 해설은 ‘성경 안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삼위일체 내적 관계들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본성을 계시하며, … 인간은 그 본질이나 관계들을 알거나 사변할 필요가 없다’는 버크너의 설명과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92 버크너는 불가해성을 불가지성과 혼동하는 듯하다. 이는 칼빈의 다소 섬세한 논점과 대조된다. 칼빈에 따르면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 세계 사이에 비례 관계가 없다는 점 등의 이유로, 우리는 ‘이 세상의 일들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파악하지 못한다.93
삼위일체 문제를 떠나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말하자면, 칼빈의 주석에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자주 언급한 내용들로부터 다음 사실 역시 분명해진다. 그는 이 주제를 문제가 될 정도로 사변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능력과 사역을 무시하거나 그 본질에 관한 과도한 사변에 몰두함으로써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 곧 ‘벌거벗은 본질’로 만드는 신학적·종교적 경향에 맞서려 했다. 그의 논증의 의도는 하나님의 대외적(ad extra) 현현이 그 본질의 계시라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출애굽기 3:14에 대한 그의 주석이 그 예이다. 이 주석에서 칼빈은 ‘나는 나인 자이다’ 또는 ‘나는 내가 될 자로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는 신적 영광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자존하시며(a se ipso)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으로 계시되기 때문이다.94 그는 단지 하나님의 ‘은밀한 본질’을 관조하는 것은 유익이 없으며, 오히려 이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구체적으로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역량(potency)’을 향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곧, 벌거벗은 본질이 아니라 계시 안에서 알려진 본질을 향하는 것이다.95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 본질이 그 자체로는 불가해하다고 밝힌 다음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되셨는지를 진술하는 이러한 방식은 칼빈의 주석과 강의와 설교의 여러 대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구절에 대한 버크너의 논평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칼빈이 신앙과 경건에 관한 함의를 이끌어 내는 것은 사실이며, 여기서는 모세를 사례로 삼는다. 그러나 그의 긴 해설이 잘 보여 주듯이, 그의 의도는 하나님의 본질의 개념을 신속히 떠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들에 대한 자신의 전통적 이해를 신앙의 필요와 연결하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칼빈은 이 구절이 하나님의 본질을 어떻게 제시하는지 논의할 뿐 아니라 플라톤에 대한 비판도 덧붙인다. 플라톤은 하나님을 궁극적 존재인 ‘존재하는 것’(τὸ ὄν)으로 올바르게 규정했지만, 다신론에 맞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본질들을 포괄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지 못했다.96 칼빈의 이 논평을 하나님의 본질 안에 모든 개별 사물의 원형들이 들어 있다는 토마스주의 견해에 대한 언급으로 읽을 수도 있다.97
한 가지 사례를 더 들면 충분할 것이다. 예레미야의 우상 숭배 비판을 해설하면서, 칼빈은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들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능력’ 또는 ‘불가해한 본질과 위엄’과 아무런 유사성도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잘못 나타낸다고 지적한다.98 예레미야는 우상들을 규탄한 다음 참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로 나아간다. 칼빈의 설명에 따르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은 자기 ‘위엄’의 ‘광휘’로 ‘모든 민족들의 오류’를 물리치신다. 나아가 예레미야는 ‘영원하신 하나님은 진리이시며’, ‘자기 안에서 만족하시는’ 또는 ‘충족되시는’ 분으로서 ‘[자신의] 본질 안에 … 참되고 완전한 영광’을 가지신다고 말한다. 선지자는 이어서 ‘하나님은 생명이시다’라고 덧붙인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per se) 불가해한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자기 영광의 표징들뿐 아니라’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다른 증거들도 주시기 때문이다.99 이 대목에서 칼빈의 논증은, 칼빈이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들이나 절대적 완전성들에 관하여 오래 논하지 않았다는 버크너의 주장과 도무지 부합하지 않는다. 특히 칼빈이 ‘그러므로 이제 선지자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 말한 뒤 그 실천적 작용(praxis)으로 내려간다’는 논평으로 자신의 해석을 이어 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100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칼빈의 접근을 특징짓는 것은 그 속성들이 하나님의 본질에 내재한다는 점과, 그 속성들이 성경과 창조 질서 안에서 계시된다는 점을 함께 밝히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 관하여 자신이 지나친 사변이라고 판단한 것을 반박한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채우신다고 말할 때,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은 무한하므로 하늘과 땅 전역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 참이다’라고 증언한다.101 그러나 이 진리가 ‘경솔하거나 열매 없는 사색’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참된 신앙을 증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potentia)에 초점을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102 그렇다고 이러한 반사변적 논평이 그 속성, 여기서는 무한성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 본문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이 진리에 관하여 사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칼빈의 요지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 논의하거나 탐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마땅한 범위를 넘어 하나님의 본질을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03 따라서 이사야 46:4의 ‘나는 동일하다’를 주석하면서, 칼빈은 ‘이는 하나님께서 그 본질 안에서뿐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언제나 동일하시며 자기 자신과 같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분이 동일하심을 깨닫게 된다’고 밝힌다.104 이러한 본문들은 칼빈이 신적 ‘능력들(powers)’을 ‘행위들(acts)’로 지칭하고 ‘본질적 속성들’에 관한 논의를 반대한 독특한 ‘비사변적 방법론’을 채택했다는 버크너의 지나치게 안이한 명제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칼빈은 하나님이 드러내시든 발휘하시든 그 계시가 하나님이 무엇이신지, 곧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킨다고 분명히 논증했다. 또한 신학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본질과 속성들을 모두 제시할 것이라고 보았다. 동시대와 후대의 여러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105 칼빈은 전통적 교리와 신앙생활의 연결을 강조했다. 하나님을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그분의 사역들을 바라보아야 하지만,106 파커가 상기시켜 주듯이, 하나님이 자기 사역들 안에서 주시는 계시는 하나님을 그 자신 안에 계신 그대로 계시한다.107
버크너는 또한 로마서 1:20 주석에서 칼빈이 신적 덕능(virtutes) 또는 완전성들에 관하여 한 진술을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주장 … 곧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단순한 본질 안에 함께 붙어 있다는(co-adhere) 주장’으로 읽는 데 반대한다. 그 근거는 ‘칼빈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들을 통해 알려지는 하나님의 능력들이다’라는 것이다.108 버크너가 사용한 다소 이례적인 용어 ‘함께 붙어 있다(co-adhere)’는 제쳐 두더라도, 그가 반대하는 것은 그와는 상당히 다르게 진술된 주장인 듯하다. 곧 칼빈이 ‘속성들은 분할할 수 없고 환원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는 전통적 견해’를 견지했다는 주장이다.109 칼빈의 논증을 다시 상기해 보자. ‘우리가 이 지점에 이르면 신성(divinitas)이 우리에게 알려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덕능(virtutibus)과 함께가 아니면 성립할 수 없다. 그 모두가 그 아래[곧 신성 아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110 마치 칼빈이 우리가 성경과 자연을 통해 얻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들에 관한 긍정적 지식을 가진다고 논증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칼빈은 어떤 속성들은 본질적이고 다른 속성들은 본질적이지 않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속성들을 구별하지 않으며, 단지 속성들의 대외적(ad extra) 발휘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덕능(virtutes)에 관한 이 논평에 앞서, 칼빈은 영원성(aeternitas), 능력(potentia), 영광(gloria)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시작이 없고(sine initio) 자존하신다(a se ipso)고 덧붙인다. 뒤에서는 하나님의 영원성(aeternitas), 지혜(sapientia), 선하심(bonitas), 진리(veritas), 공의(iustitia), 긍휼(misericordia)을 언급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이 속성들을 모두 본질적으로 소유하시며, 그것들이 단순히 대외적(ad extra) ‘행위들’로 계시되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 특정 구절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신성이라는 개념 안에 그분의 모든 덕능(virtutes)이 신성(divinitas)에 ‘포함되어’ 있거나 그 안에 ‘들어 있다’는 인식이 들어 있다고 논증한다. 버크너의 주장과 달리, 이것이 분명하게 함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단순성이다. 실로 절대적 속성들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단순성만이 아니라, 여기서는 특히 관계적 속성들과 관련된 단순성이기도 하다. 결국 칼빈은 ‘하나이면서 단순한 하나님의 본질’을 말했고,111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들을 불변하게 그리고 영구히 소유하신다고 전제했으며,112 버크너도 인정하듯이 프랑스 개혁파를 위하여 작성한 1559년 신앙고백서 초안의 속성 목록에 단순성을 포함시켰다.113 칼빈은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논평을 한다. ‘하나님에게 그분의 선하심보다 더 고유한 것은 없다.’ 칼빈은 선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라고 썼다. ‘모든 선이 그분 안에 있다.’114 엘로힘이라는 신명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 안에 포함된’ ‘능력(potentia)’을 가리킨다.115 마찬가지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행위는 하나님의 본질의 영원성을 가리킨다.116 하나님의 계획과 지혜를 영원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칼빈은 하나님이 불변하시다는 점에서 인간과 다르시며, 함축적으로 단순하시다고 논평한다. ‘그분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의 본질과 영원성에 속한다.’117 나아가 이 특정 대목에서도, 앞서 언급한 다른 대목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덕능(virtutes)은 발휘되고 있는 능력들도 행위들도 아닌 다양한 하나님의 특성들을 가리키므로, ‘역량들(potencies)’이 가장 적합한 번역으로 보인다.
속성들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모세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단언할 때, 이는 불가해한 그분의 본질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백성에게 나타난 그분의 능력과 영광에 대해서도 이해되어야 한다.’118 이와 비슷하게, ‘그분은 이전에는 자신의 본질 안에서 불가해하셨으나, 그때 자신의 능력이 낳은 결과에 의해 분명히 알려지셨다.’119 또는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곧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임을 설명하였다. 하늘과 땅을 채우시는 그분의 본질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120 이것은 다양한 속성들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후험적(a posteriori) 접근이지, 독특한 ‘비사변적 방법’이 아니다. 칼빈은 이러한 속성들이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는 전제를 제쳐 두기는커녕, 속성들의 본질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리고 덕능(virtutes)이라고 불리는 속성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속성들이 하나이면서 단순한 하나님의 본질에 내재한다는 이해에 기초하여 본질에 대한 이해를 세운다.
칼빈의 주석과 강의와 설교에는 신론에 관한 교의 항목(locus)을 도출하고 구성할 만큼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들에 대한 논평이 충분하지 않다는 버크너의 주장은, 그가 글을 쓰기 훨씬 전에 리샤르 슈타우퍼의 탁월한 저서 『Dieu, la création et la providence dans le prédication de Calvin』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제시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칼빈의 견해의 논의는 슈타우퍼의 결론을 분명히 강화한다. 칼빈이 형이상학적 속성들과 본질적 속성들을 고찰했다는 점을 버크너가 부인하는 것은, 아마도 ‘본질’의 의미와 ‘형이상학적’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바를 다소 불명확하게 이해한 데서 비롯된 듯하다. 마지막으로, 버크너를 잘못된 해석으로 이끈 것은 virtus의 번역이다. virtus 또는 potentia로 이해되는 ‘능력(power)’은 반드시, 또는 주로, 발휘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발휘나 작용을 가리키는 경우에도 언제나 내재하는 역량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경우에는 본질적 속성이나 완전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이나 virtus가 드러남이나 발휘를 통해 계시된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본질적 속성이나 virtus를 소급하여 가리킨다.
이러한 결론들은 우리 연구의 또 다른 초점으로 우리를 이끈다. 곧 하나님의 속성들을 덕능(virtutes)으로 이해한 칼빈의 견해, 그리고 이 용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번역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칼빈이 이 용어를 사용했고, 실제로 즐겨 사용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었다. 파커는 오래전에 그 점을 확립했다. 논쟁의 대상은 이 용어의 의미, 특히 그 단수형과 복수형 용례와 관련된 의미였으며, 나아가 이러한 용례들이 하나님의 속성들 일반에 대한 칼빈의 접근을 어떻게 반영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여기서 우리는 버크너(그리고 배틀스)에 맞서, 의미와 번역을 결정하는 것은 용례의 문맥이며, 특히 단수형과 복수형이 나란히 놓일 때에는 두 형태를 서로 다르게 번역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버크너로 하여금 덕능(virtutes)을 주로, 어쩌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대외적(ad extra) 행위들로 잘못 해석하게 만든 것은 복수형 virtutes를 ‘능력들(powers)’로 번역한 일이었다. virtus 또는 potentia의 일차적인 의미는 내재하는 역량이며, 하나님의 경우에는 본질적 속성이나 완전성이다. 구체적으로는 대외적으로(ad extra) 발휘되거나 드러날 수 있는 속성이나 완전성이다. 버크너의 오해는 대내적(ad intra)인 본질적 속성과 그 대외적(ad extra) 발휘 사이의 연결을 끊어 버린다. ‘능력들(powers)’이 초래한 혼란을 고려할 때, virtutes를 번역하는 데 타당성이 있는 세 가지 역어가 남는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근대 초기의 어휘에 대한 고려에 근거한다. 곧 ‘덕들(virtues)’, ‘역량들(potencies)’, ‘완전성들(perfections)’이다. ‘속성들(attributes)’도 여전히 사용할 수 있지만, 덜 바람직하다.
버크너는 칼빈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들을 제시하고 해설하는 방법을 비사변적이고 구원론적이며 ‘골격만 있는(skeletal)’ 것으로 규정한다. 칼빈이 지나친 사변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점은 거의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버크너의 견해와 달리, 우리는 칼빈이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 사변하기를 거부한 것이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 논의하기를 거부하거나,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들, 완전성들 또는 역량들이 하나님의 본질에 내재하며 그 본질의 계시라는 결론을 삼가는 것을 뜻하지 않았음을 보았다. 칼빈이 하지 않은 일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 선험적(a priori) 논의를 전개하거나, 하나님의 단순성을 전제할 때 속성들이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구원론으로 환원하거나, 단지 ‘골격만 있는’ 최소한의 틀을 제공하는 것으로 서술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칼빈은 구원 사역에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해설적이고 권면적이며 송영적인, 속성들에 관한 많은 성찰을 제시한다. 또한 칼빈은 틀을 제시하듯 하나님의 본질을 그저 언급하고 속성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 의미와 함의를 논의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칼빈의 접근과 일부 전통적 신학 체계에서 발견되는 접근의 차이는 내용상 또는 방법론상의 차이라기보다 문학적 장르의 문제라는 워필드의 설명은 여전히 타당하다.
Benjamin B. Warfield, “Calvin’s Doctrine of God,”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7 (1909): 381–436. 유익한 토론을 해 준 올든 매크레이에게 감사한다. ↩
참조: Émile Doumergue, Jean Calvin, les hommes et les choses de son temps, 7권 (Lausanne: G. Bridel, 1899–1927), 4:88–90, 119–31; Warfield, “Calvin’s Doctrine of God,” 387–91 및 여러 곳; Richard Stauffer, Dieu, la création et la providence dans le prédication de Calvin (Bern; Frankfurt: Lang, 1978), 105–50; Paul Helm, John Calvin’s Idea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11–34; J. Todd Billings, “The Catholic Calvin,” ProEccl 20, no. 2 (2011): 120–34, 특히 128–29; 함께 참조할 문헌은 Richard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The Rise and Development of Reformed Orthodoxy, ca. 1520 to ca. 1725, 4권 (Grand Rapids: Baker, 2003), 3:205–8. ↩
Warfield, “Calvin’s Doctrine of God,” 383. ↩
참조: Shirley Guthrie, Christian Doctrine, 제2판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94), 103–4; 함께 참조할 문헌은 Wilhelm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Harold Knight 번역 (London: Lutterworth, 1956), 54; Charles Partee, The Theology of John Calvin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2008), 66–67. ↩
Forrest Buckner, “Calvin’s Non-Speculative Methodology: A Corrective to Billings and Muller on Calvin’s Divine Attributes,” Calvinus Pastor Ecclesiae: Papers of the Eleventh International Congress on Calvin Research, Herman Selderhuis 편집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6), 241–42. ↩
같은 글, 242. 칼빈의 해설에 형이상학적 문제가 있음을 부인하는 버크너의 주장은 워필드의 신중한 진술과 달리 상당히 불명확하고 아무런 한정도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워필드는 칼빈의 접근이 ‘형이상학적으로 규정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준수학적 추론으로 그 속성들에서 연역해 낸 가르침의 체계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으며, 선험적 접근을 따르지도 않았다고 말한다(“Calvin’s Doctrine of God,” 387).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무한하고 영적인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칼빈이 자주 언급하며 여러 하나님의 속성으로 일관되게 설명하는 본질 자체는 이 단어의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변적인’ 문제가 아니다. ‘본질’의 문제는 무엇임(quidditas)에 관한 것이며, 아주 단순하게 ‘그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
Buckner, “Calvin’s Non-Speculative Methodology,” 237, 242. ↩
같은 글, 242. ↩
참조: Billings, “Catholic Calvin,” 128–29; 함께 참조할 문헌은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3:207. ↩
Buckner, “Calvin’s Non-Speculative Methodology,” 237. ↩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3:207. ↩
같은 곳 참조; 함께 참조할 문헌은 Billings, “Catholic Calvin,” 129. ↩
Ford Lewis Battles, “Virtutes Dei: Theatrum Mundi,” Battles, Interpreting John Calvin, Robert Benedetto 편집 (Grand Rapids: Baker, 1996), 223–33. ↩
Buckner, “Calvin’s Non-Speculative Methodology,” 234, 241–42.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본질적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구별은 본질적 속성과 관계적 속성 사이가 아니라 절대적 속성과 관계적 속성 사이의 구별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버크너는 인격적(personal) 속성을 관계적 속성과 잘못 동일시한다. 관계적 속성은 밖으로 나아가는 작용의 속성인 반면, ‘인격적’ 속성은 삼위일체의 위격적 특성들을 가리킨다. ↩
예를 들어 Calvin, Commentarii in Isaiam prophetam, 사 43:21, J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G. Baum, E. Cunitz, E. Reuss 편집, 59권 (Brunswick: Schwetschke, 1863–1900), 제37권, 97열(이하 CO); Calvin, Praelectiones in Ezechielis prophetae, 겔 11:18, CO 40, 241열. 필자는 Commentaries of John Calvin, 46권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4–1855)을 참고하였으나, 칼빈의 라틴어 원문을 반영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수정하거나 다시 번역하였다. ↩
Calvin, Commentarii in Isaiam prophetam, 사 44:15–17, CO 37, 116열; 같은 책, 사 38:13, CO 36, 657열 참조. ↩
같은 책, 사 9:6, CO 36, 197열; Calvin, Commentarius in epistolam ad Timotheum I, 딤전 1:17, CO 52, 261열. ↩
Calvin, Sermons sur le Deuteronome, 제56설교, 신 7:19–24, CO 26, 567열: “Et quel est-il? O il ne nous faut pas seulement concevoir ce mot de Dieu: mais luy attribuer ses qualitez: Qu’il est puissant, et terrible.” [‘그분은 어떠한 분이신가? 오,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이 단어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며, 그분께 그분의 성질들을 돌려야 한다. 곧 그분은 능하시고 두려우신 분이다.’] ↩
Calvin, Sermons sur livre de Job, 제7설교, 욥 1:20–22, CO 33, 101열: “I’ay dit que ceci emporte plus, d’autant qu’encores quelqu’un pourroit attribuer à Dieu toute puissance souveraine…” [‘나는 이것이 더 많은 것을 함축한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하나님께 모든 지고한 능력을 돌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책, CO 33, 587열 참조: “tout-puissant. Quand l’Escriture attribue ce tiltre à Dieu, ce n’est pas qu’il puisse faire s’il vouloit, et qu’il ne face rien, qu’il se repose au ciel: mais elle entend la puissance de Dieu avec l’effect.” [‘전능하신 분. 성경이 이 칭호를 하나님께 돌릴 때, 그것은 그분이 원하기만 하면 행하실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늘에서 쉬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을 그 실제 효과와 함께 이해한다.’] ↩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n libris quatuor nunc primum digesta, certisque distincta capitibus, ad aptissimam methodum: aucta etiam tam magna accessione ut propemodum opus novum haberi possit (Geneva: Robertus Stephanus, 1559), 1.13.1. 여기서는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3권, John Allen 번역, Benjamin B. Warfield 서론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909)의 영어 번역을 따르되, 필요한 경우 수정하였다. 배틀스가 여기서 immensitas(무변성)를 ‘infinity’(무한성)로 잘못 번역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John T. McNeill 편집, Ford Lewis Battles 번역, 2권 (Philadelphia: Westminster, 1960), 1.5.10 참조. ↩
Calvin, Commentarius in Epistolam Pauli ad Romanos, 롬 1:21, CO 49, 24열: “Concipi Deus non potest sine sua aeternitate, potentia, sapientia, bonitate, veritatem, iustitia, misericordia.”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성, 능력, 지혜, 선하심, 진리, 의, 긍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
Calvin, Institutio (1559), 1.5.10: “vitam, sapientiam, virtutem … justituam, bonitatem, clementiam.” [‘생명, 지혜, 능력 … 의, 선하심, 자비.’] 설교들에서 다룬 불변성에 관해서는 Stauffer, Dieu, la création et la providence, 107–8 참조. ↩
Calvin, Institutio (1559), 1.10.2: “ejus aeternitatem καὶ αὐτουσίαν … ejus virtutes … clementiam, bonitatem, misericordiam, justitiam, judicium, veritatem.” [‘그분의 영원성과 자존성 … 그분의 덕능들 … 자비, 선하심, 긍휼, 공의, 심판, 진리.’] ↩
같은 책, 1.14.21: “immensas sapientiae, justitiae, bonitatis, potentiae.” [‘지혜, 공의, 선하심, 능력의 헤아릴 수 없음.’] ↩
같은 책, 3.20.40: “extra omnem locum … supra omnem aut corruptionis aut mutationis … infinitae magnitudinis aut sublimitatis, incomprehensibilis essentiae, immensae potentiae, aeternae immortalitatis.” [‘모든 장소를 초월하여 … 모든 부패나 변화를 초월하여 … 무한한 크기 또는 높음, 불가해한 본질, 한량없는 능력, 영원한 불멸성을 지닌.’] ↩
같은 책, 3.20.41: “gloriam … sanctitas … eius virtutes, potentia, bonitas, sapientia, justitia, misericordia, veritas.” [‘영광 … 거룩함 … 그분의 덕능들, 능력, 선하심, 지혜, 의, 긍휼, 진리.’] ↩
Calvin, Confession de foy faite d’un commun accord par les eglises qui sont disperesse en France, §§2–4, CO 9, 741열: ‘nous croyons en un seul Dieu, eternel, d’une essence spirituelle, infinite, incomprehensible et simple.... Nous croyons aussi que dieu, par sa vertu, sagesse, et bonté incomprehensible, a crée toutes choses.... Nous croyons que le mesme Dieu gouverne toutes ses creatures, et dispose et ordonne selon sa volunté tout se qui advient.’ [우리는 영원하시며, 그 본질이 영적이고 무한하며 불가해하고 단순한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헤아릴 수 없는 선하심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는다. … 우리는 동일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의 뜻에 따라 배치하고 정하심을 믿는다.] ↩
Calvin, Sermons sur le Deuteronome, CO 29, 709열: ‘Voila donc pourquoy Dieu se nomme ialoux, non point qu’il soit sujet à nulles passions: mais c’est pour monstrer que son honneur luy est precieux.’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질투하는 자라고 부르시는 이유는 이렇다. 그가 어떤 정념에 종속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영예가 자신에게 소중하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Stauffer, Dieu, la creation et la providence, 106–7 참조. ↩
Derek Thomas, Calvin’s Teaching on Job: Proclaiming the Incomprehensible God (Fearn, Ross-shire: Mentor, 2004), 115–224 참조. 특히 154, 157 참조. ↩
Calvin, Sermons sur livre de Job, 설교 33, 욥 9:1–6, CO 33, 409열. ↩
Calvin, Confession de foy, §4, CO 9, 741열. ↩
Calvin, Praelectionum in Ieremiam prophetam, 렘 25:8–9, CO 38, 478열. ↩
Calvin, Commentarii in Isaiam prophetam, 사 40:22, CO 37, 22열. ↩
Thomas, Calvin’s Sermons on Job, 175–76 및 여러 곳. ↩
이 번역의 근거에 관해서는 Battles, ‘Virtutes Dei: Theatrum Mundi,’ 223–33을 더 참조하라. ↩
Calvin, Institutio (1559), 1.10.2. ↩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estienne (Geneva: Jean Crespin, 1560), 1.10.3. 1560년 프랑스어판의 절 구분은 1559년 라틴어판의 절 구분과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라. ↩
Calvin, Institutio (1559), 1.10.2: ‘Iisdem etiam epithetis illum insigniunt prophetae, quum ad plenum volunt sanctum ejus nomen illustrare. Ne multa congere cogamur, in praesentia nobis Psalmus unus sufficiat, in quo tum exacte summa omnium ejus virtutem recensetur, ut nihil omissum videri queat. Et nihil tamen illic ponitur quod non liceat in creaturis contemplari.’ [선지자들도 그의 거룩한 이름을 충분히 밝히고자 할 때에는 같은 칭호들로 그를 지칭한다. 많은 구절을 모아야 할 필요가 없도록, 지금은 하나의 시편으로 충분하게 하자. 거기에는 그의 모든 덕능의 총체가 매우 정확하게 열거되어, 아무것도 빠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곳에는 피조물 가운데서 고찰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Institution (1560), 1.10.3 참조. ↩
Calvin, Institutio (1559), 1.5.10: ‘Porro lucidissimae quum illic appareant: quorsum tamen potissimum spectent, quid valeant, quem in finem a nobis sint reputandae, tum demum assequimur dum in nos ipsos descendimus, ac consideramus quibus modis suam in nobis vitam, sapientiam, virtutem Dominus exserat, suam iustitiam, bonitatem, clementiam erga nos exerceat.’ [더욱이 그것들은 거기에 아주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무엇을 주로 지향하는지, 어떠한 효력이 있는지, 우리가 어떤 목적을 위해 그것들을 고찰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 안으로 내려가 주께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 안에 자신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향하여 자신의 의와 선하심과 자비를 행사하시는지 살펴볼 때에야 비로소이다.] ↩
Calvin, Institution (1560), 1.5.10 참조: ‘Or combien que les vertus de Dieu sont anisi pourtraites ... Dieu desploye en nous as vie, sagesse & vertu, & eserce envers nous sa iustice, bonté & clemence.’ [비록 하나님의 덕능이 이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자신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향하여 자신의 의와 선하심과 자비를 행사하신다.] ↩
Calvin, Praelectionum in duodecim prophetas minores, 말 4:2, CO 44, 491–92열: ‘potentiae, iustitiae, et aliarum virtutem quae oculis nostris obiicit.’ [그가 우리 눈앞에 제시하시는 능력과 공의와 그 밖의 덕능들.] ↩
Calvin, Institutio (1559), 1.10.2. ↩
같은 책, 3.20.41: ‘Dei gloriam ... nominis Dei sanctitas ... fieri non potest quin se proferent ejus virtutes, potentia, bonitas, sapientia, justitia, misericordia, veritas’ [하나님의 영광 …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함 … 그의 덕능, 곧 능력, 선하심, 지혜, 의, 긍휼, 진실하심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Institution (1560), 3.20.41 참조: ‘la gloire de Dieu ... la saincteté du Nom de Dieu ... il est impossibile que ses vertus ne viennent en avant: assavoir puissance, bonté, sagesse, iustice, misericorde, verité.’ [하나님의 영광 …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함 … 그의 덕능, 곧 능력, 선하심, 지혜, 의, 긍휼, 진실하심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
Calvin, Commentary on Romans, 롬 1:20, CO 49, 24열: ‘Ubi si ventum est, iam se profert divinitas: quae nisi singulis Dei virtutes nequit consistere, quando sub ea omnes continentur.’ [이 지점에 이르면 신성이 드러난다. 이 신성은 하나님의 모든 덕능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그것들이 모두 그 아래 포함되기 때문이다.] ↩
Calvin, Commentaires sur toutes les epistres de l’apostre S. Paul, et aussi sur l’epistre aux Hebrieux: item, sur les epistres canoniques de S. Pierre, S. Iehan, S. Iaques, et S. Iude (Geneva: Conrad Badius, 1561), 롬 1:20, 10쪽. ↩
Calvin, Commentarie upon the Epistle of Saint Paul to the Romanes, Christopher Rosdell 옮김 (London: For John Harison and George Bishop, 1583), 롬 1:20, 13쪽. ↩
Calvin, Commentaries o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John Owen 번역·편집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9), 70. ↩
Calvin, Institution (1560), 1.10.3: ‘toute la somme de ses proprietez est si diligemment recitée, qu’il n’y a rien laissé derriere.’ [그의 모든 특성의 총체가 아주 꼼꼼히 열거되어, 빠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Parker,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53 참조. ↩
Parker,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53. Institutio (1559), 1.5.9 참조: ‘A suis enim virtutibus manifestatur Dominus’ [주께서는 자신의 덕능을 통해 드러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Institution (1560), 1.5.9: ‘Car Dieu nous est manifesté par ses vertus.’ [하나님은 자신의 덕능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시기 때문이다.] ↩
T. H. L. Parker, The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A Study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Grand Rapids: Eerdmans, 1959), 53–54. ↩
Battles, ‘Virtutes Dei: Theatrum Mundi,’ 223–24. ↩
같은 글, 224. ↩
반대 입장은 같은 글, 224–25 참조. ↩
Francis Gouldman, Dictionarium etymologicum (Cambridge: Joannes Field, 1669), ‘Potentia’ 항목. ↩
같은 책, ‘Virtus’ 항목. ↩
John Rider, Bibliotheca scholastica (Oxford: Joseph Barnes, 1589), ‘Vertue’ 및 ‘Vertue or strength’ 항목. Gouldman, Dictionarium etymologicum의 동일한 정의도 참조. ↩
Rider, Bibliotheca scholastica, ‘Power, ability or force’ 및 ‘Power to do or speak’ 항목. ↩
Randle Cotgrave, A Dictionarie of the French and English Tongues (London: Adam Islip, 1611), ‘Vertu’ 항목. ↩
같은 책, ‘Propieté’ 항목. ↩
Calvin, Praelectionum in Ieremiam prophetam, 렘 23:23–24, CO 38, 438열 참조. ↩
Johannes Altenstaig, Lexicon theologicum (Antwerp: Petrus Bellerus, 1576), ‘Virtus’ 항목. (Vocabularius theologie라는 제목의 이 저작 초판은 1517년 하게나우에서 출판되었다.) ↩
Altenstaig, Lexicon theologicum, ‘Virtus intellectualis’ 항목. ↩
Joël Biard, ‘Diversité des fonctions et unité de l’âme dans la psychologie péripatéticienne (XIVe–XVIe siècle),’ Vivarium 46 (2008): 342–67, 특히 344–48, 359 참조. 또한 Sacha Salatowsky, De Anima: Die Rezeption der aristotelischen Psychologie im 16. und 17. Jahrhundert (Amsterdam: B. R. Grüner, 2006), 192–93, 360; Sander W. de Boer, The Science of the Soul: The Commentary Tradition on Aristotle’s De anima, c. 1260–c.1360 (Leuven: Leuven University Press, 2013), 147, 227–52 참조. ↩
Léon Baudry, Lexique philosophique de Guillaume d’Ockham: Étude des notions fondamentales (Paris: Lethielleux, 1958), ‘Virtus moralis’ 항목: ‘Virtus non est alia res, sed passiones debite moderatae.’ [덕은 별개의 사물이 아니라 적절히 조절된 정념들이다.] ↩
Matthias Martinius, Lexicon philologicum praecipue etymologicum et sacrum, 제2판 (Frankfurt: Thomas Matthias Goetzen, 1655), ‘Virtus’ 항목. ↩
같은 책, ‘Potentia’ 항목. ↩
Richard A. Muller, The Unaccommodated Calvin: Studies in the Form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164–70 참조. ↩
Randall Zachman, ‘Calvin as Analogical Theologian,’ SJT 51 (1998): 162–87 참조. ↩
Thomas Aquinas, Summa contra gentiles, 1.92: ‘Quomodo in Deo ponatur esse virtutes? … oportet ergo bonitatem divinam omnes virtutes suo modo continere, unde nulls earum sevuncum habitum in Deo dicitur, sicut in nobis. Deo enim non convenit bonum esse per aliquid aliud ei superadditum, sed per essentiam suam, cum sit omnino simplex … non est igitur virtus in Deo aliquis habitus, sed sua essentia.’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안에 덕들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은 모든 덕능을 자신의 방식대로 포괄해야 한다. 그 때문에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 안에서와 같이 하나님 안에 습성으로 있다고 말해지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단순하시므로, 자신에게 덧붙여진 다른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선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로 말미암아 선하시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덕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습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다.] ↩
같은 책: ‘habitus imperfectus actus est quasi medius inter potentiam et actum; unde et habentes habitus dormientibus comparantue, in Deo autem est actus perfectissimus, actus igitur in eo non est sicut habitus et scientia, sed sicut considerare, quod est actus ultimus et perfectus.’ [습성은 가능태와 현실태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불완전한 현실태이다. 그래서 습성을 지닌 사람들은 잠든 사람들에 비유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현실태가 가장 완전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의 현실태는 습성이나 지식과 같은 것이 아니라 관조와 같은 것이며, 관조는 궁극적이고 완전한 현실태이다.] ↩
Calvin, Commentarii in Isaiam prophetam, 사 41:1, CO 37, 33열: ‘Dei potentia, bonitate, sapientia, aliisque eius virtutibus.’ [하나님의 능력, 선하심, 지혜, 그 밖의 그분의 덕능.] ↩
Calvin, Commentarius in Epistolam Pauli ad Romanos, 롬 1:21, CO 49, 24열. ↩
Calvin, Institutio (1559), 1.5.10. ↩
Calvin, Commentarius in Epistolam Pauli ad Romanos, 롬 1:21, CO 49, 24열. ↩
Calvin, Praelectiones in Ezechielis prophetae, 겔 11:18, CO 40, 241열. ↩
Calvin, Commentarii in librum psalmorum, 시 145:4, CO 32, 413열. ↩
Calvin, Commentarius in epistolam ad Timotheum I, 딤전 1:17, CO 52, 261열. ↩
Calvin, Commentarii in Isaiam prophetam, 사 41:4, CO 37, 37열. ↩
같은 책, 사 46:4, CO 37, 156열. ↩
같은 책, 사 45:18, CO 37, 144열: ‘Quod repetit se Deum esse, non tantum as asserendam essentiam spectat, sed ut se discernat ab omnibus idolis … nec enim tantum hic agitur de aeterna essentia Dei, ut nonulli putant, sed de officiis omnibus quae ad ipsum solum pertinent, ne ulla ex parte ad creaturas transferantur.’ [그분이 자신이 하나님임을 거듭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자신의 본질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우상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것이다. … 여기서 다루는 것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듯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만이 아니라, 오직 그분께만 속하는 모든 사역이며, 그 사역의 어느 부분도 피조물들에게 넘겨지지 않도록 한다.] ↩
Buckner, ‘Calvin’s Non-Speculative Methodology,’ 234. ↩
Stauffer, Dieu, la création et la providence, 105. ↩
Calvin, Praelectiones in Ezechielis prophetae, 겔 1:25–26, CO 40, 57열. ↩
같은 책, CO 40, 53열: ‘Dei aeternitas et prima essentia.’ [하나님의 영원성과 근원적 본질.] ↩
Calvin, Commentarii in Isaiam prophetam, 사 1:24, CO 36, 51열: ‘aeterna Dei essentia et maiestas.’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과 위엄.] ↩
Calvin, Praelectiones in Ezechielis prophetae, 겔 1:25–26, CO 40, 55열: ‘ubi simplex sit Dei mentio, intellifi totam essentiam.’ [단순히 하나님을 언급하는 곳에서는 본질 전체가 이해된다.] ↩
같은 책, CO 40, 56열: ‘Una est enim essentia Dei. Ergo tota deitas maniffesta fuit in carne.’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성 전체가 육신으로 나타났다.] ↩
같은 책, 겔 1:28, CO 40, 60열: ‘neque essentia nisi impie discerpitur, quamvis sit distinctio inter personae.’ [본질을 나누는 것은 불경건한 일이지만, 위격들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
Calvin, Congrégation sur la divinité de Iésus-Christ, CO 47, 471–72열. ↩
같은 책, CO 47, 472–73열. ↩
같은 책, CO 47, 473열. 칼빈이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성자의 자존성을 논증하기 위해 상당히 상세히 논의를 전개한다는 점도 유의하라. 이 또한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문제로서, 신론의 전통적 해설들과 잘 부합한다. 이에 관해서는 Brannon Ellis, Calvin, Classical Trinitarianism, and the Aseity of the S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참조. ↩
Buckner, ‘Calvin’s Non-Speculative Methodology,’ 239. ↩
Calvin, Congrégation sur la divinité de Iésus-Christ, CO 47, 470열: ‘les secrets qui sont yci contenus, ne sont point declarez si ouvrement que nous les puissons comprehendre, comme nous comprenons les choses de ce monde.’ [여기에 담긴 비밀들은 우리가 이 세상의 일들을 이해하듯 그것들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명백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
Calvin, Mosis reliqui libri quatuor in formam harmoniae, 출 3:14, CO 24, 43열: ‘Hoc quidem satis liquet, Deum sibi uni asserere divinitatis gloriam, quia sit as se ipso ideoque aeternus.’ [하나님이 자신에게만 신성의 영광을 주장하신다는 점은 충분히 분명하다. 하나님은 자존하시며, 따라서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
같은 곳, CO 24, 44열: “Et quid profuisset Mosi arcanam Dei essentiam quasi coelo inclusam speculari nisi de eius omnipotentia factus certior clypeum fiduciae sibi inde fecisset? Docet ergo Deus se umum esse sacrosancto nomine dignum, quod perperam ad alios translatum profanatur: deinde immensam suam virtutem commendat.” 〔번역〕 “모세가 하나님의 전능을 확신하여 거기서 자신을 위한 신뢰의 방패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마치 하늘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밀한 본질을 관조하는 일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지극히 거룩한 이름에 합당한 분은 오직 자신뿐임을 가르치신다. 그 이름은 부당하게 다른 것들에게 옮겨져 모독된다. 이어서 그분은 자신의 무한한 역량을 일깨워 주신다.” ↩
같은 곳: “unicum esse Dei absorbeat quascunque imaginamur essentiae.” 〔번역〕 “하나님의 하나이신 존재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본질들을 포괄한다.” ↩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a, q. 44, a. 3을 보라. Aquinas, Summa contra gentiles, 1.54와 비교하라. ↩
Calvin, Praelectionum in Ieremiam prophetam, 렘 10:8, CO 38, 69열: “Quid enim simile est ligno aut lapidi cum immensa Dei potentia? cum incomprehensibili essentia et maiestate?” 〔번역〕 “대체 나무나 돌과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사이에 무슨 유사성이 있는가? 그분의 불가해한 본질과 위엄과는 무슨 유사성이 있는가?” ↩
같은 책, 렘 10:10, CO 38, 71열: “extollit Dei gloriam ... dicit, Atqui Iehovah est Deus ... sibi sufficere ad omnes gentium errores ... prodierit eius maiestas, quia tantus sit eius fulgor ... Deus est veritas ... contentus est in se ipso ... Desu sit vita ... per se est incomprehensibilis: tamen non tantum signa gloriae suae nobis ponit ante oculos, sed quodammodo praebet se palpandum.” 〔번역〕 “하나님의 영광을 높인다 … 그러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한다 … 모든 민족들의 오류에 맞서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시다 … 그분의 위엄이 드러나면, 그 광휘가 그토록 크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 자기 안에서 만족하신다 …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 그 자체로는 불가해하시지만, 그럼에도 자기 영광의 표징들을 우리 눈앞에 두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자신을 만져 알 수 있도록 내어 주신다.” ↩
같은 곳, CO 38, 72열: “Nunc ergo propheta, postquam loquutus est de essentia Dei, descendit ad praxin ipsam.” 〔번역〕 “그러므로 이제 선지자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 말한 뒤 바로 그 실천적 작용으로 내려간다.” ↩
같은 책, CO 38, 438열: “Verum quidem est, extendi essential Dei per coelum et terram, ut est infinita.” 〔번역〕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므로 하늘과 땅 전역에 펼쳐져 있다는 것은 참이다.” ↩
같은 곳. [역주: 이 각주 다음의 문장에서 원문은 “not a denial”과 “not essential”을 함께 쓰고 있다. 문맥에 따라 무한성이 본질적 속성임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옮겼다.] ↩
같은 책, 렘 51:19, CO 39, 459열: “nempe non investigemus Dei essential supra quam par est.” 〔번역〕 “곧, 우리는 마땅한 범위를 넘어 하나님의 본질을 탐구해서는 안 된다.” ↩
Calvin, Commentarii in Isaiam prophetam, 사 46:4, CO 37, 156열: “sed eundem, ac sui similem perpetuo Deum esse significat, non tentum in essentia sua, sed respectu nostri, ut eundem ipsi sentiamus.” 〔번역〕 “이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동일하시며 자기 자신과 같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분의 본질 안에서뿐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그러하시므로, 우리가 그분이 동일하심을 깨닫게 된다.” ↩
버크너는 방법론상의 큰 대조를 시사하지만, Wolfgang Musculus, Loci communes sacrae theologiae (Basel: Johannes Hervagius, 1563), 41–51(pp. 697–800)에 주목하라. 여기서는 신적 속성 각각에 대한 논의가, 분량이 긴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성경에 근거하며 전통적 교리와 실천적 묵상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다. 후대 개혁파의 사례로는, 예를 들어 윌리엄 퍼킨스가 Exposition of the Symbole or Creede of the Apostles에서 하나님의 전능에 관하여 논한 대목을 보라. 이 글은 The Works of that Famous and Worthie Minister of Christ, in the Universitie of Cambridge, M. W. Perkins (Cambridge: John Legat, 1603), 150–52에 수록되어 있으며, 여기서도 본질적 속성에 대한 논의와 실천적 적용이 균형을 이룬다. ↩
Calvin, Praelectionum in Ieremiam prophetam, 렘 51:19, CO 39, 459열. ↩
Parker,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54. ↩
Buckner, “Calvin’s Non-Speculative Methodology,” 242n17. ↩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3:207. ↩
Calvin, Commentarius in Epistolam Pauli ad Romanos, 롬 1:20, CO 49, 24열. ↩
Calvin, 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 요 5:18, CO 47, 112열: “una et simplici Dei essentia.” 〔번역〕 “하나이면서 단순한 하나님의 본질.” ↩
Calvin, Commentarius in epistolam ad Timotheum I, 딤전 1:17, CO 52, 261열: “Epitheta, quae hic tribuit Deo, tametsi perpetua sunt, tamen proprie conveniunt loci circumstantiae. Vocat regem aeternum vel saeculorum, in quem nulla cadit mutatio: invisibilem ... solum sapientem.” 〔번역〕 “그가 여기서 하나님께 붙이는 칭호들은 항구적이기는 하지만, 이 대목의 상황에 특히 알맞다. 그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하나님을 영원한 왕 또는 시대들의 왕이라 부르고, 보이지 않는 분 … 홀로 지혜로우신 분이라 부른다.” ↩
Calvin, Confession de foy, §§2–4, CO 9, 741열: “nous croyons en un seul Dieu, eternel, d’une essence spirituelle, infinite, incomprehensible et simple.... Nous croyons aussi que dieu, par sa vertu, sagesse, et bonté incomprehensible, a crée toutes choses.... Nous croyons que le mesme Dieu gouverne toutes ses creatures, et dispose et ordonne selon sa volunté tout se qui advient.” 〔번역〕 “우리는 영원하시고 영적이며 무한하고 불가해하며 단순한 본질을 지니신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다. …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불가해한 선하심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는다. …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의 뜻에 따라 배치하고 정하심을 믿는다.” ↩
Calvin, Sermons sur le Deuteronome, 설교 55, 신 7:16–19, CO 26, 548열. Stauffer, Dieu, la création et la providence, 110에서도 인용하고 논의한다. ↩
Calvin, Commentarius in Genesin, 창 1:1, CO 23, 15열. ↩
같은 곳, CO 23, 16열. ↩
Calvin, Congrégation sur la divinité de Iésus-Christ, CO 47, 471열: “ce qui est en luy, est de son essence et eternitie.” 〔번역〕 “그분 안에 있는 것은 그분의 본질과 영원성에 속한다.” ↩
Calvin, Mosis reliqui libri quatuor in formam harmoniae, 신 6:4, CO 24, 263열: “Quod Moses Deum unum esse asserit, non solum ad eius essentiam, quae incomprehensibilis est restringitur, sed intelligi etiam debet de virtute et gloria quae populo innotuerat.” 〔번역〕 “모세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단언하는 것은 그분의 불가해한 본질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백성에게 알려진 그분의 능력과 영광에 대해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
Calvin, 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 요 1:3, CO 47, 4열: “Nam quum in sua essentia prius esset incomprehensibilis, tunc eius vis effectu palam fuit cognita.” 〔번역〕 “그분은 이전에는 자신의 본질 안에서 불가해하셨지만, 그때 그분의 능력은 그 결과를 통하여 명백히 알려졌다.” ↩
Calvin, Mosis reliqui libri quatuor in formam harmoniae, 출 19:12, CO 24, 192열: “Quid significet descens Dei paulo ante exposuimus, nempe demonstrationem virtutis: quoniam eius essentia quae coelum et terram implet loco non movetur.” 〔번역〕 “우리는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곧 능력을 드러내는 것임을 조금 전에 설명하였다. 하늘과 땅을 채우는 그분의 본질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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